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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뭔가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함께이지 못한 소외자가
운명처럼 달고 있는 열등감일까, 본능일까.

물론 삶의 참된 가치와 아름다운 순간은
고독보다 연대에서 삐져 나온다....
하지만 강요된 연대와 섣부른 영원의 맹세와
철딱서니 없는 동지의식은 오히려 삶에 독이 될 뿐이다.

고독할 준비를 하고, 동시에 자연스럽게
웃어줄 연습을 할 것.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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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14년 10월 10일

2014. 12. 14. 18:39 from blur girl's diary
가볍고 유쾌한 마음으로 <럼 다이어리>를 보았다.
영화 속에서 조니 뎁은 무척이나 근사한 신문기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근사하다는 표현을 택한 이유는,
조니 뎁의 매력이 마구 발산되어서라기 보다,
푸에르토리코의 해변가 카페에서 럼을 마시는 게
부러워서라기 보다,
사회적 사기에 항거하는 뉴욕타임즈(사칭이지만)...
기자라는 역할이 정의감 터져서라기 보다,

영화 속 조니 뎁의 처지가 멋스럽게 보였기 때문.
그의 처지는 딱히 좋다고 할 수 없는데,
그는 럼에 찌들어 결국 환각까지 볼 정도의
엉망진창인 상태이고, 소설을 쓰고 싶어하지만
결국 발표 하나 못한 채 푸에르토리코까지
도망 와 형편없는 신문사에 취직한 글쟁이고,
푸에르토리코 건달들에게 큰소리 하나 못치는
겁 많은 소시민에, 이런저런 악운이 겹쳐
결국 럼 한 잔 살 돈마저 없어 전전긍긍하는,
여타 그를 둘러싼 환경은 이른바 '근사한' 영역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군인이라는 나의 신분은 여기서 차치하자.
'군인인 너는 지금 무엇이든 부럽겠지',
'상병 마인드가 그렇다, 얘' 식의 빈정거림은
당신이나 나나 무익한 대화의 씨발, 아니 시발점이다.
나는 여러 모로 조니 뎁이 부러웠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엉망으로(럼을 이용하여)
망치고 있었으나 그에겐 자신을 파괴시킬 자유가
있었고, 어떻게 파괴시킬지 선택지조차 다양했다.
그곳이 푸에르토리코의 눈부신 햇살과
꿈이 일렁이는 바다와 순박한 주민들이 함께여서,
그것이 파괴가 아닌 아메리칸 드림이나 로망이라고?

글쎄, 자유는 부자유스러울 때 가장 빛이 난다.
가령 당신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광화문,
그 조야한 메트로폴리탄의 뻔뻔한 면면을 가보라.
거기서 당신이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냥 남루하고 피곤할 따름이다. 석관동?
나는 지금 석관동의 마법 같은 지점,
일요일이 공간으로 현현화되고 있는 그 순간을
명백히 기억하고, 되새기고 있지만 실제 그곳을
살아가던 나는 '오늘 반찬은 뭐 먹지?' 하고
기계적으로 자전거를 끌고 병신 같은 석관시장을
헤매던, 항상 숙취에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던
서울 변두리의 비루한 일상에 한없이 허물어지던
것이 고작이었다.

예컨대, 일상이 이상(혹은 그 반대)으로 변모하는
과정, 관광(serching light)이 형식적인 패키지 투어로
전락하는 지점.
군인인 나는 주거지 이동의 자유가 없다.
군인인 내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환상을 전유하는
쾌락이자 고통이라 할 수 있는데,
푸에르토리코에서 타락하는 소설가의 여정이나
히치하이킹 하듯 디종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고학자와
영원한 불륜을 떠나는 부르주아 여성의 모험을
부러워하는 것은 영화를 잘못 보고 있거나
괴상하게 탐닉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관광지로 남을 것을 염원하는 푸에르토리코의
일상은 숙취처럼 깨질 것만 같은 두통의 공간화,
디종에서의 로맨틱한 불륜은 다가올 현실적인
불안(당장 그녀는 자신의 어린 아이를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연인들> 결말, 잔느 모로의 슬픈 얼굴은
다분히 <졸업>에서 결혼식장에서 빠져나와 버스에
오른 두 사람의 현실적인 표정과 일맥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인들>의 불륜과 도피는 일종의
환상 내지는 꿈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험을 앞서
지른 바 있던 안나 까레니나는 스스로 기차에 몸을
던지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선망하는 석관동은 그냥 석관동이다.
일요일마다 염병할 대학생들이 버린 쓰레기들을
치우지 않아 지저분한 거리와 음침한 여인숙들,
게으른 햇빛과 기력을 쇠하게 하는 나른함,
새로울 것 하나 없이 조금씩 침몰해가는 마을.

여기서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러한 회의는 삶을 기대할 만한 게 아닌
비극으로 추앙할 뿐이다.
이곳에서 나의 주된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직도 삶에 기대할 것이 있는가?
만약 기대할 것이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이미 나는 많은 것을 실패했고, 그것이 무용함을
경험했는데 영원히 실패를 되풀이해야 하는가?)
만약 기대할 것이 없다면 앞으로 내게
주어진 이 거대한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어쩌면 나는 군인이라는 신분이 갖는 취약점,
그러니까 섣부른 기대와 자유에 대한 열망이
되돌아올 실망과 좌절과 초조함에 미리 겁을
먹고 두려워 '어차피 세상은 거지 같아.
나가봤자 기대한다한들 전과 같이 술 마시고
비틀비틀 꼼짝도 못 하다 절망만 할 테지'
하고 파괴의 당의정을 두르는 걸지도 모른다)

<럼 다이어리>에서 조니 뎁은 결국 글을 쓴다.
그의 독백을 빌리자면 "자기 목소리"를 찾는다.
그는 끔찍하게 열악한 아파트에서 잉크리본
타자기를 두들기며, 재떨이 위에 올려둔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셔츠 소매를 아무렇게 접어
올린 다음, 책상 위에 반쯤 남은 럼과 벽에
뒤죽박죽 붙여진 사진들과 함께
글을 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고, 과장하자면 쿠퍼액이 찔끔
나올 만큼 벅찬 기분에 휩싸였다.
(푸에르토리코 시골 클럽에서 중절모를 쓰고
블루스를 연주하는 밴드를 볼 때도)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이등병 때부터
꿈꾸던, 많은 걸 잃어버릴 때까지 품고 있던
미래의 단면과 무척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허락된 생애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다
죽고 싶다는 거다. 세계 곳곳에서 우연적으로,
혹은 위대한 문화의 노력으로 발현되고 있는
혁명의 단초들을 직접 보고, 그것을 내 나름의
목소리로 정리하고 싶다.
이론화시킬 수도 있고, 동북아 문화 벨트의
공동체 운동일 수도 있고, 심지어 초국가적
반국경 비밀수사일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횡행되고 있는 변화의 실험들을
주목하고, 그것을 함께 공유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후 어느 정도의 실행과 진척을
보고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군인이기에 갖는 꿈이라고 비웃어도 이제는
상관없다. 나는 이 꿈을 위해 많은 걸 잃어
버렸고, 죽음이 나를 지겨워할 때까지 염세의
문고리까지 매만지다 왔다.
나는 삶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기에
이제는 변화를 위해 남은 삶을 운용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살고, 네가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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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10월 8일

2014. 12. 14. 18:38 from blur girl's diary
어제 근무는 끔찍했다.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 기계적으로 티비를 틀어
루이 말의 <연인들>을 보았다. 이것은 지난 연휴 때
앞부분 10분 정도를 보다가 깜빡 잠이 들어
못 본 영화였다.

영화 속 잔느 모로의 얼굴은 무척 피곤해보였다....
그것이 극중 역할이 보유한 고단함인지,
잔느 모로 실제 삶에서 가중된 권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쥘 앤 짐>에서의 천방지축으로 웃던 그녀를
어렴풋이 기억하는 나로선,
덩달아 고단해졌다.

어제부터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고 있는데,
보부아르 식으로 얘기하자면, 잔느 모로는
여자란 성에 갇힌 느낌이었다.
(실제 영화 속 잔느 모로가 처한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고)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본 루이 말의 작품은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다. 불륜!
<처형대 위의 엘리베이터>에서 불륜을 위해
완전범죄를 감행하다 스스로 길로틴에 목을
집어넣은 연인에 대한 우화나
<데미지>에서 아들의 연인을 흠모하는
앵글로색슨 신사의 비극,
<애틀란틱 시티>에서 (조금 불륜하곤 거리가
멀지만) 좌절된 남성성을 살인으로 해갈하는
노인의 노익장 등등.
대부분 그의 영화(불륜)은 실패로 끝이 나고
남은 건 고단한 얼굴, 고단한 삶의 몇몇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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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10월 6일

2014. 12. 14. 18:37 from blur girl's diary
일전에 언급했던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기나긴 혁명>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제 당직사관의 변덕으로
연등을 할 수 없어 후임의 스탠드를 강탈하여
완독할 수 있었다. 아무튼, 다음부터 발췌 내용.

1956년은 영국에서 '리얼리즘'이 비평 용어로...
사용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그것을
기념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100년간 리얼리즘의
역사는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하고 씁쓸해서 어떤
기념행사라도 아마 대규모 난투극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확인되고 고정되어
전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방법과 태도를 묘사하는 방법이며, 자연스럽게도
그 묘사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교환하고 발전시키
면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평범하고 동시대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의 주류에는
불쾌하고 빈곤하고 누추한 것에 대한 관심이라는
특수한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렇듯 리얼리즘은 부분
적으로는 평범한 부르주아 세계관에 반하는 저항
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리얼리스트들은 나아가
대다수의 부르주아 예술가들이 차라리 무시하고
싶어 하는 일상적인 소재를 선택하기도 했다. 이렇듯
구호로서의 '리얼리즘'은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묘사는 결코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중략)
그것은 행위의 요소로서 사용될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인 리얼리즘은 아니다. 그것이 묘사를 위한
묘사로만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이러한 방법의 본질인
균형을 사실상 파괴할지도 모른다. (중략) 삶의 방식이란
집단도 단위도 아닌, 전체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소설은 분명 진정한 공동체를 요구한다.
즉 개인들이 일이나 우정, 혹은 가족 같은 하나의
관계로만 연결된 공동체가 아니라, 수많은, 서로
얽히는 관계로 연결된 공동체 말이다. (중략)
대부분의 현대소설에서 개인들 간의 연결은
상대적으로 단일하고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이다.
이것은 문학 형식의 변화이기 이전에 이 사회,
적어도 소설사들 대부분이 가장 가까이 접하는
사회의 일부분의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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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14년 10월 5일

2014. 12. 14. 18:36 from blur girl's diary
휴일의 마지막 날, 여지없이 영화를 보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어제 이등병 시절 이후로 처음
축구를 했고 아침에 일어나보니 안 쓰던 허벅지
근육이 터지는 듯하여... 뭔가 움직이기가 싫었다.

가이 리치의 <스내치>는 빈둥대고 싶은 일요일을
위한 영화처럼 보인다. 작품을 만드는 입장으로서...
'재미있기만 하다'는 류의 비평(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은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적어도 재미는 있었다, 는 긍정적인 감상평과
재미 말고는 남는 게 없었다, 는 시니컬한 비평이
묘하게 공존하는 이 말을 최근 많이 들어왔다.

가이 리치의 <스내치>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러미스>와 비교했을 때 로맨틱코미디에
버금가는 한없이 가볍고 낙천적인 갱스터 코미디
영화인데, <이스턴 프러미스>의 깽들이 어찌나
살벌하게 묘사되던지 덕분에 <스내치>의 깽들은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속 악당들처럼 보일 지경이고
단지 장르적인 형식을 수립하기 위해 깽들을 동원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분은 얼마나 실감나게 암흑가를
묘사했느냐, 살인 장면을 얼마나 진짜처럼 연출
했느냐, 암흑가의 실제라는 명제를 두고 수위의
비교우위를 가리는 게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측면에서, 또 많은 오해를 받아온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요즘 읽고 있는
레이먼드 윌리암즈의 <기나긴 혁명>에서도 언급
되고 있는데, 거의 다 읽고 있으니 조만간
소개할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차라리 난 <스내치>에 등장한 브래드 피트에 대해
말하는 게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
나는 사실 브래드 피트란 배우에 대해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청춘 시절, 그는 독보적인 외모로
말미암아 오히려 영화에서 계속 튀어나오곤 했다.
가령 <세븐>의 경우, 점점 노이로제에 빠져드는
젊은 형사를 연기하는 브래드 피트는 영화의
눅눅진 분위기에서 기묘하게 이질적이다.
뭐, 개인적인 주관일 수도 있고 누군가와 술 먹다
그게 아니지, 멍청아 하고 핀잔을 먹인다면 바로
수긍할 수도 있는 단견이다.
아무튼 그런 그런 배우려니 하고 있었는데,
어제 점호 시간 직전까지 생활관에서 아이들이
틀어놓던 티비에서 <월드 워Z>가 잠깐 흘러나왔는데,
신이시여... 브래드 피트도 무척 늙었구나.
만화 <괴짜가족>에서 구제 청바지에 환장하는 인물로
패러디된 캐릭터(이 사진을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와
점점 닮아져 가고 있어(예컨대 못나지고 있다는 거다)
마음이 참 아팠다.
한편 오늘 본 <스내치>에서의 브래드 피트는 무척
멋스러웠는데, 이것은 비단 세월이나 피부의 노화 탓이
아니라 브래드 피트가 등장하는 영화의 두 부류에 따른
차이인 듯하다. 나는 그가 비렁뱅이 타입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훨씬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설경구가 검사로 나오는 <공공의 적2>가 끔찍하고,
<박하사탕>의 비루한 사내가 경이로웠던 맥락으로)
반면 선량하고 깨달음을 주는, 계급적으로 구분하자면
전문가-관리자에 해당하는 중산계급의 역할로 나오는
영화 속에선 영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어색한 파티에
온 것만 같다는 것이다.

감히 말하자면, 브래드 피트는 너무도 뚜렷한 자기의
색채와 융화되지 않는(유연하지 못한, 고집스러운)
아우라로 말미암아 연기와 영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배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는 별개로, <스내치>에서 브래드 피트의 독특한
영어 억양은 볼 만하다. (나와는 달리 자유를 누리고
있거나 쫓기고 있는 사람들은 부디 이 영화를 봄으로써
시간을 낭비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단결활동처럼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자리에서 할 수 없이 시간을 보내야
할 때 보기 좋은, 킬링 타임이라기보다 포맷팅 타임을
하기 위한 영화에 가까우니 말이다)
영화 속에서 집시로 등장하는 브래드 피트는 아일랜드
억양도 아니요, 영어도 아닌 참으로 얄궂은 억양으로
친구들과 작당을 하거나 껄렁껄렁거리는데, 인상적이다.
더불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는 <트레인스포팅>의
스퍼드도 깜짝 출연하는데 여전히 안습이다.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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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오늘 소대원들과 야외 벤치에서 치킨과 피자를
잔뜩 먹었다. 이렇게 다 모여 외부음식을 먹기는
또 처음이었다. 단체사진의 느낌이 너무 좋아
배가 불렀다.

시간이 훌쩍 지나 오늘이나 2014년의 추석 다음날
(난 이날 온종일 생활관에 틀어박혀 <해파리 공주>란...
애니메이션을 독파했다)이 떠오르며 아름답다고
느낄지 모르겠다. 아름다운 순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게 아름다운 순간이란 정의는
특정 시간과 사람들이 이미 정립된 기준처럼
존재하는데, 그 선을 엄격히 지키며 침대 밖에
튀어나온 발을 자르거나 늘이며 새로운 감각을
훼방 놓는다. 이것이 바보스럽단 걸 알지만
당분간 어쩔 수 없는 듯하다. 어서 새로운 경험이
나를 앞질렀으면 좋겠다. 예컨대 차곡차곡 정리를
하고 싶다는 거다.

요즘 이소라에 홀딱 반해 있는데,
그녀와 나는 11월 전갈자리로,
그녀는 분명 지독한 여자일 테고,
많은 상처를 주고, 비극 속에 살고 있으리란
확신 아닌 확신이 든다. 그리고 어쩐지
그녀와 나는 평행우주처럼 형태를 달리한
동일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는 무척이나 섹시하고(이런 인상은 처음인데),
동경의 대상이 되기 충분한 사람이다.
만약 여자가 존재해야 한다면(나의 세계에)
이소라란 여자만이 여자의 지위를 독식하지 않을까?
한편, 나는 이소라의 여덟 번째 앨범을 과감히 샀는데,
함께 산 1집~3집의 노래들을 모아 엮은 베스트 앨범과
비교하여 들었을 때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8집에서 이소라는 나는가수다의 록 밴드 세션을
데려온 양 시종 로킹한 사운드를 자랑하는데,
솔직히 까놓고 말하여 온갖 록 음악을 섭렵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지금의 내겐 별로 새로운 음악적 시도는
조금도 아니어서, '그녀에겐 새로운 지점이겠지만
과연 이것이 오늘날 범람하는 록 실험에 피곤한
청취자에게도 흥미를 끌 수 있을까?' 싶었다.
차라리 그녀는 나와 밴드를 해야 한다.

일본어 공부 더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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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14년 10월 3일

2014. 12. 14. 18:34 from blur girl's diary

1.
"오늘은 (부산영화제를 못간 나만의) 영화제 첫날입니다.
개막작은 에릭 로샹의 <동정없는 세상>입니다"
란 말을 일본어로 쓰고 싶었으나 실패.
조금 더 공부가 필요하다.

 

2.
국군의 날부터 일요일까지 연휴.
영화를 실컷 보고 있다.
에릭 로샹의 <동정없는 세상>
아벨 페라라의 <킹 오브 뉴욕>
사무엘 풀러의 <픽업 온 사우스 스트리트>
세 편 모두 만족스러워 기분이 참 좋으다.

 

<동정없는 세상> 같은 경우, 영화 보면서 큰 웃음 터진
나로선 참 드문 경험을 마련해준 한 장면이 있었다.
전 여자친구를 피해 발코니에 숨어있다가
현 여자친구의 전화가 오자 '에라, 모르겠다'
부웅 집 안으로 뛰쳐들어오는 장면은 정말이지 압권.

만약 이뽀와 나탈리가 결국 어긋난 채,
그러니까 이뽀는 구속되고, 나탈리는 혼자 춤을 추며
환희의 임계점과 실망의 출발점 사이에서 끝났다면
무지 비극적이겠으나, 사실 타 영화들이 곧잘 써먹기도 했고
에릭 로샹은 조금 긍정적이랄까, 판타지적인 결말로 쫑.

 

프란시스 코폴라,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알렌 등
뉴요커란 정체성을 구태여 강조하는 감독들에 비해
아벨 페라라의 위상과 인지도는 글쎄, 놀랄 정도도 낮다.
아마 코폴라, 스콜세지, 우디 알렌은 술을 마시며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아벨 페라라, 그 녀석 너무 솔직하다니까'

<악질 상사>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아벨 페라라의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총과 마약과 욕과 쓰레기로
샤워를 두 시간 정도 하는 기분이다.
도시 뒷골목에서 노숙하는 기분.

<킹 오브 뉴욕>도 마찬가지인데, 유명 배우들의
푸릇푸릇한 시절 얼굴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로렌스 피쉬번(분명히 크레딧엔 래리 피쉬번으로 나온다.
로렌스 피쉬번의 동생인가 했는데, 로렌스 피쉬번 본인인듯)
웨슬리 스나입스, 데이빗 카루소 등등.
특히 모피어스로 무게 잡던 로렌스 피쉬번을 기억한다면
정신 나간 흐긴 깽으로 까부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CSI 마이애미에서 무진장 진지한 수사반장을
연기하는 데이빗 카루소의 혈기왕성한 모습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다. 영화는, 뉴욕의 왕으로 군림하던 프랭크 화이트와
그를 추격하던 경찰이 맨하탄 전철에서 대치하고
총에 맞은 프랭크가 교통정체로 옴짝달싹 못하는 타임스퀘어
앞에서, 택시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으며 끝나는데
어쩐지 뉴욕이란 거대 생물의 혈관에 노폐물이 쌓여
경동맥 협착증을 일으킨 것만 같은 장면이었다.

 

사무엘 풀러에 대한 사소한 일화.
대학 시절, 촬영 감독과 스텝의 대화를 엿듣는데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사무엘 풀러의 영화를 얘기했고
정말이지 사무엘 풀러란 이름을 처음 듣던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3.
문득 느낀 건데,
페이스북을 컴퓨터로 한다는 건
좀 멍청한 짓인 것 같다.

 

4.
건강해, 라는 말은 종종 상처가 된다.
그냥 '앞으로 널 볼 일은 없겠지.
그래도 난 예의는 지켰다?' 는 느낌.

 

5.
왜 이렇게 놀고 있냐고 물으신다면,
일요일까지 연휴라고 말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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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14년 9월 30일

2014. 12. 14. 18:30 from blur girl's diary

당직 근무를 마치고 소피아 코폴라의 <마리 앙뚜아네트>를 보았다.
커스틴 던스트가 시종 멍청한 척하기 바쁜 희대의 골빈 영화
<브링 잇 온>마저 햇빛처럼 웃는 그녀 덕분에 즐거웠던 적이 있던
나는 요즘 커스틴 던스트가 참 좋다. 심지어 가끔은 오드리 햅번보다
더 좋다. 왜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지 않게 친구들에게
'내 고교 여자친구가 커스틴 던스트를 닮았어' 하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믿지 않는다.

 

아무튼, 밤샘 근무를 마치고 영화 한 편을 본다는 것은 전투에
가까운 일이다. 어지간한 의지력이 없다면 가소로운 일이다.
안타깝게도 <마리 앙뚜아네트>는 당직근무자의 애정,
그러니까 영화와 커스틴 던스트를 향한, 을 무색하게
또한 의지박약아로 만드는 작품처럼 보인다.

열심히, 열심히 대부의 딸이 찍었을 이 영화는 무엇을 위해
고군분투했는지 안타까울 지경인데, <브링 잇 온>이 그토록
한심한 영화적 가치를 가졌으면서도 뻔뻔스럽고 능청스럽게
골빈 태도를 고수함에 따라 '그래도 참 커스틴 던스트는
햇빛처럼 웃는다'는 명제를 남겼지만 <마리 앙뚜아네트>는
대부의 딸이 짊어진 부담(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마피아란
남성 권력 판도와 대비되는 바르세이유 궁의 여성 권력과
관계도를 그려내야 한다는 강박을 지닌 듯한데, 한편으론
그냥 뉴욕 클럽에서 놀기 좋아하는 가벼운 클러버로서의
자의식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느낌이었다)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팝 음악과 물신 숭배적인 카메라 시선이 나로서는
커스틴 던스트에게 집중할 수 없게 하였다.

 

이는 아주 심각한 기준이 될 것이다.
커스틴 던스트의 웃음을 티없이 바라볼 수 있느냐,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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