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것 없는 방구석에서
요즘 부쩍 내 다락방이 심심하다. 내 자투리 시간을 성실히 함께 하던 만화책들의 신선함이 탁해질 무렵, 바로 그 순간부터인 것 같다. 하루는 작정하고 (맨정신으론 좀 그러니까) 술을 왕창 마시면서 옛날 게임을 시작했는데 이틀을 가지 못했다. 영화도, 책도... 마찬가지였다. 할 것 없는 방구석에서 나는 너무나도 심심했다. 꽤 강렬할 정도로 싫은 감각이었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경험. 하지만 뭔가 대안이 없으면 오늘밤도, 내일밤도, 애인이 없는 모든 밤들을 그렇게 보내야겠지? 나는 꽤 노력했다. 용산 전자상가를 찾아가 <바이오 하자드4>를 사야지.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좀비 게임인가 싶지만, 난 원래 겨울에 비치 보이스를 듣는 놈이니까 상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다시 찾은 용산은 대부분의 게임 매장(뿐만 아니라 다른 상가도)도 말 그대로 허물어져 있었고, 겨우 한 블록 남은 상가의 게임 매장 사람들(지하에 유폐된 초능력자들 같았다. 콘 사토시 만화에 나오는)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 아유, 요새 <바이오 하자드4> 붐이에요? 엊그제부터 다 쓸어가네. 없어요, 없어. 정말 그랬다. 나온지 10년이 지난 게임의 리바이벌 소식은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래도 큰 맘 먹고 서울까지 나왔건만 너무 한 거 아닌가. 운명에 굴복하기 싫어서 (울 것 같은 얼굴을 숨기고) 빨빨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은 한 곳에선 일본판을 2만 5천 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하나님이 정말 나한테 게임하지 말라는 거구나. 너 지금 게임 할 때 아니다. 게임하면 진짜 좆된다, 진짜. 그렇게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별 생각 없이 들린 소니 대리점에서 소니 디카(똑딱이) 수리비를 엄청나게 청구했다. 그 염병할 케이블은 한국에 재고가 없어서 다음주에나 보내준다고 했다. (글을 쓰는 지금까지 안 왔다) 올해 나는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 두 개를 수리했는데 모두 엇비슷한, 나로선 상당한 금액의 수리비가 들어갔다. 뭔가 운명 같다. 게임하지 마라, 앞으로 사진 찍을 일 많으니 투자하는 셈 쳐라.
아무튼 덕분에 요즘 책은 많이 읽는다. 선물 받은 애처럼 온종일 읽는다. 메인은 작업을 위한 공부 겸 읽는 이론서, 비평서들이지만 하마터면 <바이오 하자드4> 할 시간에도 이젠 책을 읽는다. 하루키의 <포트레이트 인 재즈>는 생각보다 가벼워서 이틀에 독파했다. 남는 게 없는 책. 하루키도 러닝머신 위에서 대충 생각한 몇 자를 그대로 원고로 넘긴 느낌이다. 심지어 재즈를 듣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으니, 이는 좀 심각한 거 아닌가. (뭐, 나도 제이비엘 스피커에 엘피 레코드로 소파에 누워 제임슨을 마시며 들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궁시렁거릴 수밖에) 그래도 읽는 동안은 재밌었다! 하고 넘어가려는데 '리뷰 알바'를 하면서 문득 책에 나온 문구가 떠올랐다. 그것은 줄리안 캐논볼 애덜리를 소개하는 글이었으며(그는 이 책에 내가 들은 몇 안 되는 재즈 뮤지션 가운데 하나이며, 다음의 인용문은 그를 지칭하여 묘사한 게 아니란 걸 참고했음 한다)
"진정 뛰어난 음악이란(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죽음을 구현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암흑으로의 추락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대개 악의 과실에서 짜낸 농밀한 독이다. 그 독을 마실 때의 감미로운 경련, 시간의 흐름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강렬한 뒤틀림이다."
음,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니저러니, 하루키는 글을 참 잘 쓴다. 다 읽고 나면 뭔가 속은 느낌이랄까, 그런 찝찝함이 있는데 그것 역시 다 그가 글을 잘 쓰기 때문이고, 그런 찝찝함을 읽는 동안 만큼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것도 그가 글을 잘 쓰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는 소리다. 내가 이 문장을 떠올린 이유는 '알바' 때문에 보게 된 수많은 글들에 결국 부재하는 그 절박함. 문학은 결국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두 절박함이 마주치는 순간의 힘 아닐까. 본질적으로 나아가면 절박함의 근원을 죽음에서 찾을 수 있고, 결국 예술은 죽음에 대한 경미한 체험이 된다. 그렇다고 진짜 죽어선(혹은 진짜 죽으라면) 곤란하다. 거기서부턴 사건이 된다. 아무튼,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절박함은 결국 생에 주어진 조건 속에서의 투쟁과 반동 사이의 긴장, 딜레마이고, 위대한 예술은 죽음 언저리를 우리 대신 다녀옴으로써 우리에게 거대한 정서적 환기를 시킨다. 그런데 특히나 내가 '알바'에서 본 글들은 분명 삶에서 건져올린 일기, 혹은 전기문들임에도 거짓말에, 또 다른 거짓말을 보태는 구태의연한 윤리 교과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죽음이란 말끔히 소독된 양로원에 모여앉아 걸그룹 아이돌을 보는 노인들 같은 느낌이랄까.
책을 많이 읽고 있어서인지, 눈의 피로에 대한 의식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평소에도 눈을 쉬질 않잖아? 책을 안 보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할 테니... 그것만이 아니라 삶의 거의 모든 정보를 시각 요소로 접하니 눈은 정말 쉬질 못하는 것이다. 끔찍했다. 요새 문학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는데, 어젯밤 국방 라디오를 듣기도 했고, 눈이 아닌 귀로 듣는 문학에 대한 아이디어가 조금 생겼다. 나만 생소해서 그렇지 해외든 국내 어디든 낭송회 형식의 문학 행사가 많긴 하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우리들만의 낭송회"는 무척 아름다웠다. 또 재미있었다. 문학적이었고. 그런데 요새 새로이 관심 갖게 되는 낭송회, 그니까 "우리들만의 낭송회는 아닌 문학적 순간 창조로서의 낭송회"는 어떤 분위기일까? 가령 아이오와 대학 주변부에서 수시로 행해지는 작가들의 낭송회 자리. 몇 안 되는 독자들, 그것도 동료 작가들, 이 피곤한 논쟁을 일삼는 그런 자리인지? (홍대 클럽의 평일 공연과 다를 게 뭔가!) 보들레르의 <뱀파이어>를 카바레 탁상 위에 올라가 마구 낭송하는 '랭보 삘의' 불란서 양아치 동영상이 있나 싶어 유튜브에 검색해봤더니 기절초풍할 만한 것이 있긴 하다. 차마 말할 순 없고, 나중에 검색해보시길. 정훈병 시절, 정훈장교와 고흐전(展)을 갔을 때의 충공깽이 새록새록.
아, 할 것 없는 방구석, 그렇다고 눈을 쓰긴 싫고, 그럼 무엇을 해야 하나. 결국은 연애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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