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도 유분수
내 다락방엔 어울리지 않게 두 개의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는데, 하나는 마릴린 먼로가 휴양지에 엎드려 육덕미를 과시하는 엽서 크기의 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직 계통의 정장을 입은 드류 배리모어가 지미 팰론 어깨에 기대어 지긋이 정면, 그러니까 책상에 앉은 나를 바라보는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 포스터가 그것이다.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는 닉 혼비의 소설 <피버 피치>를 영화화한 <퍼펙트 캐치>가 한국에서 개봉하면서 이처럼 노골적이면서 별 매력 없는 제목이 붙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다양한 제목으로 검색이 가능하며 원작자인 닉 혼비와 주연 배우로 분한 드류 배리모어가 제작 단계부터 참여했다. 영화사적으로든, 흥행적으로든 괄목할 만한 성과는 당연히 없으며 오늘날까지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신 구조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드류 배리모어의 열렬한 팬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녀의 팬도 아니고(이 영화 전까지 드류 배리모어가 출연한 영화는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닉 혼비의 소설 역시 본 적이 없다. 포스터에 선전했다시피 이 영화는 카메론 디아즈를 유명하게 만든 천박한 소프트 포르노 영화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패럴리 형제가 연출하긴 했지만 코엔 형제처럼 거장도 아니다. 기대치 제로의 상황에서 내가 이 영화를 찾아본 이유는 두 개 정도가 될 것인데, 하나는 군 생활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였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여운을 느낄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 심리,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포스터 속 드류 배리모어의 모습이 퍽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어젯밤은 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고 싶었고, 취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영화를 틀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주 불쾌하다. 나는 격노하면서 영화를 봤는데, 다른 무엇보다 영화의 허섭한 만듦새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형편 없는 영화들 속에서 나름의 빛을 발견하는 데에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던 나였기에, 이러한 실망은 다소 곤혹스러웠다. 뭐, 소비 사회의 인정 투쟁과 지위 욕망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는 건 넌센스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 양반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고 미쳐 날뛰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배우들 역시 '나는 입금된 만큼만 연기하면 끝이다' 이렇게 임하는 것처럼 떠들썩하게 날뛰긴 하는데 눈빛 안으론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들조차 이입이 안 된다는 소리 아닐까.
영화의 출발은 아주 단순하고, 어찌 보면 매력적이다. 뉴저지에서 보스톤으로 이사 온 외로운 소년이 보스톤 레드삭스의 광적인 팬이 되고, 그런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 갈등을 빚는 커리어 우먼의 좌충우돌 로맨스 코미디. 닉 혼비 자신이 레드삭스의 팬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그나마 재미있고 볼 만한 장면은 오로지 레드삭스와 관련된 씬뿐이다. (펜웨이 구장, 아예 지정석이 되어버린 곳에서 척척박사처럼 레드삭스의 역사 모든 것을 줄줄 꿰차는 사람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 심지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밖에 모르는 커리어우먼과 야구밖에 모르는 레드삭스 팬의 사랑-우격다짐조차 야구 소재에 비하면 부차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 나를 분노케 한다. 생기 없이 요란한 소동이란 거다.
이 영화의 가장 끔찍한 장면은 결말부에서 홈런처럼 터지는데, 야구광에 실망한 여자가 다시 마음을 돌려먹는 계기가 바로 남자가 시즌권을 다른 사람에게 판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이다. (12만 달러에 육박하는 금액이긴 한데, 아무튼 좀 웃긴다) 물론 남자에게 야구와 내년도 전경기 입장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녀도, 관객도 다 알겠지만 그녀의 갑작스런 심정 변화는 어이 없을 정도로 급작스럽고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어느 정도냐면, 여자는 시즌권 판매를 말리기 위해 양키즈와의 플레이오프 경기 도중 필드로 난입한다. (일부러 살살 뛰는) 심판들을 피해 센터필드부터 내야석까지 달려온 여자는 남자와 감동의 키스. 환호하는 관객들. 에휴, 어쩔 수 없군, 하는 표정의 심판들. 이 모든 게 레드삭스 팬의 허황된 판타지임이 드러나는 순간. 이후의 전개는 더욱 노골적이다. 해프닝에 힘입어 레드삭스는 양키즈에게 세 경기가 뒤지고 있었음에도 나머지 경기에서 내리 4승을 거두며 월드 시리즈까지 진출, 파죽지세를 이어나가며 결국 챔피언에 등극한다. 마지막 경기에서 선수들과 방방 뛰며 기쁨을 나누는 남녀의 진한 키스는 당연지사. 그렇다. 이것은 밤비노의 저주(레드삭스 선수였던 베이브 루스를 양키즈에 매각하면서 보스턴은 한 세기가 넘도록 우승하질 못했다)에 히스테리를 일으키다 그만 맛이 가버린 야구광 남성의 워나비다. 물론 레드삭스의 팬들이라면 금발 커리어우먼과의 만루홈런을 서비스로 하여 맥주 6입을 소파 옆에 두고 파티를 벌였겠지만(보스턴이 배경이다 보니 사뮤엘 아담스도 자주 등장한다) 남양주 다락방의 나는 공감 제로, 격노만.
야구든, 아이돌이든 유난스럽게 광적인 애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나의 방식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나만의 전유물이 되어야 할 대상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싫다. (심지어 스미스가 내한을 왔을 때에도 나는 '지들이 대공분실로 와야지 내가 왜 가냐'고 시건방진 소리를 했다. 하지만 대공분실에 찾아와도 나와 소주를 걸칠 게 아니라면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블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근의 예외적인 사례가 생겼는데 그것은 이소라다. 이소라 공연이라면 관객들 사이에서라도 보고 싶은 의향이 있다) 팬들은 자신이 받고 싶은 사랑의 양만큼 대상에게 행한다. 돌아오지 않는 사랑은, 반응 없는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다. 짝사랑은 무척 매혹적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과 연애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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