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girl's diary
14년 10월 14일
또복
2014. 12. 14. 18:41
요즘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 함은,
자정 너머 생활관에 등을 켜놓고 책을 읽다
잠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인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이 그려진 표지의 원제
<le deuxieme sexe>를 한번씩 발음하고는
침대에 배를 깔고 등불에 비친 종이와 글씨를 ...
찬찬히 읽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위 불어를 '르 듁시메 섹스'라 발음해야 하는지,
'르 듁심므 섹스'라 발음해야 하는지 불어에 문외한인
나는 전혀 모르겠다. 누가 좀 올바른 발음 좀...)
불란서 페미니스트의 책을 읽으며 야밤에 불어를
발음하는 것 역시 퍽 즐겁다.
나는 여지껏 페미니즘을 숙명적이라 생각했는데,
페미니즘이야말로 스스로가 폐지되어야 완성되는
이론이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은 사회에 만연한
고정된 성 역할의 폐지를 주창하고 있는데,
'여성학'이라 하는 특정 성 주체를 위한 이론은
결국 기존의 성 역할과 관계맺음의 정치적 올바름을
설파할 수는 있어도, 성 역할의 전복과 구분의 급진적인
폐지는 요원하고 오히려 고착화시키는데 일조할,
예컨대 진영논리로서 작용할 여지가 크다.
(그렇다고 나는 페미니즘에 막연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
남성 중 하나라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나는 '개페', '꼴페'
라는 단어에 극심한 반발을 느끼고, 페미니스트라 감히
내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을지언정 그들의 논리와 주장을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해방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억압이 철폐되려면
결국 성에 대한 인식과 규정이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것이 만에 하나 가능한 사회에선 더 이상 페미니즘이란
이론과 학문은 무소용해질 것이다. 인간을 설명함에 있어
남녀의 구분이 아닌 개별성을 거론하는 시기에서 여성학이
무슨 의미겠는가? 결국 페미니즘은 일종의 농성장이고,
혁명이 성공되면 걷어낼 천막과 같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이런 견해가 천진난만하다고 한다.
아직 책을 독파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 보부아르가
전개하는 이야기는 '인간은 자연의 한 종(種)이 아니라
역사의 관념'이라는 토대 위에서 인류의 탄생과 문명의
출발에서 비롯된 여성의 핍밥과 남성의 승리를 역사,
신화, 정신분석학, 생물학적으로 따져보며 오늘날
얼룩져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그것이 사실로
재편성되어 실제로 자행되고 있는 굴레를 고발하려는데
있다. 그녀의 이론에는 실존주의 철학의 소외 개념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실존주의를 정독하지 않은 나로선 조금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여하튼, 책은 몹시 흥미롭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드는 생각.
<제2의 성>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된다.
"남자들의 여자들에 관해 쓴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자인 동시에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물론 일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협력적 존재나 동지가 아닌 지배 대상, 극복 대상인
공포스러운 '타자'로 인식해왔다. 그것은 마치 대학 합격자가
수능을 앞둔 고교생들에게 '대학 가지 마. 한국의 대학 제도는
쓰레기 같으니까. 수능을 거부하라구' 하고 조언하는 것처럼
한계가 자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남녀는 영영 닿을 수 없는 타자로
머물게 된다. 각자의 투쟁에 몰두하는, 시니컬하게 이성적인
활동가들처럼 각자의 영역을 엄격히 지키며 간섭을 거부한다.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얘기하는 거야? 그래봤자 너는
여(남)자가 아니고, 여(남)자의 고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잖아?'
하는 진영논리의 굴레를 보고 있노라면 새누리당에 포섭된
경상도와 나머지 지역을 분리하여 각자 독립하자는 주장처럼
동성으로 결집하고 이성을 배척하는 기운마저 느껴진다.
나는 누군가를 성으로 인식하는 게 몹시 빈곤한 규정 방식
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대단히 편협하고 개인을 성 역할
범주에 가둬 그 외의 가치는 거세시키는 재단이다.
그러나 각 성은 역사를 축적해오면서 서로 다른 문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것은 탐구하고 동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가부장제와 현모양처 신화, 상남자 문화와 같이
억압적이고 착취를 정당화하는 성 담론을 문화라는 미명으로
포장해서는 안될 것이지만 호모 포비아의 반대격으로
이성간의 교류를 가로막는 경직성은 실질적인 해방,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최종 목표이자 지배와 억압이라는
오랜 테제 속에 투쟁해온 세력들 공통의 희망일 텐데,
을 방해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톨스토이의 공동선이란 개념은 모두
다시 고민해봄직하다. 그가 일생에 걸쳐 호소한
공동선이란 남녀, 농노와 지주,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급을
초월한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사랑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아내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지만...)
사랑은 어떠한 논리와 억압에 굴종해서도 아니되고,
대상을 강요하거나 한정 지어서도 아니된다.
물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과 반응들을
생각해보면 갈 날이 멀긴 하지만...
페미니즘이 목표가 당면한 편견과 차별의 폐지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복을 위한 것임을 다시금 정립하고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르 듁시메 섹스.
자정 너머 생활관에 등을 켜놓고 책을 읽다
잠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인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이 그려진 표지의 원제
<le deuxieme sexe>를 한번씩 발음하고는
침대에 배를 깔고 등불에 비친 종이와 글씨를 ...
찬찬히 읽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위 불어를 '르 듁시메 섹스'라 발음해야 하는지,
'르 듁심므 섹스'라 발음해야 하는지 불어에 문외한인
나는 전혀 모르겠다. 누가 좀 올바른 발음 좀...)
불란서 페미니스트의 책을 읽으며 야밤에 불어를
발음하는 것 역시 퍽 즐겁다.
나는 여지껏 페미니즘을 숙명적이라 생각했는데,
페미니즘이야말로 스스로가 폐지되어야 완성되는
이론이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즘은 사회에 만연한
고정된 성 역할의 폐지를 주창하고 있는데,
'여성학'이라 하는 특정 성 주체를 위한 이론은
결국 기존의 성 역할과 관계맺음의 정치적 올바름을
설파할 수는 있어도, 성 역할의 전복과 구분의 급진적인
폐지는 요원하고 오히려 고착화시키는데 일조할,
예컨대 진영논리로서 작용할 여지가 크다.
(그렇다고 나는 페미니즘에 막연한 혐오감을 갖고 있는
남성 중 하나라고 단정하면 곤란하다. 나는 '개페', '꼴페'
라는 단어에 극심한 반발을 느끼고, 페미니스트라 감히
내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을지언정 그들의 논리와 주장을
폄훼할 생각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해방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억압이 철폐되려면
결국 성에 대한 인식과 규정이 재정립되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것이 만에 하나 가능한 사회에선 더 이상 페미니즘이란
이론과 학문은 무소용해질 것이다. 인간을 설명함에 있어
남녀의 구분이 아닌 개별성을 거론하는 시기에서 여성학이
무슨 의미겠는가? 결국 페미니즘은 일종의 농성장이고,
혁명이 성공되면 걷어낼 천막과 같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이런 견해가 천진난만하다고 한다.
아직 책을 독파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을 통해 보부아르가
전개하는 이야기는 '인간은 자연의 한 종(種)이 아니라
역사의 관념'이라는 토대 위에서 인류의 탄생과 문명의
출발에서 비롯된 여성의 핍밥과 남성의 승리를 역사,
신화, 정신분석학, 생물학적으로 따져보며 오늘날
얼룩져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오해와 그것이 사실로
재편성되어 실제로 자행되고 있는 굴레를 고발하려는데
있다. 그녀의 이론에는 실존주의 철학의 소외 개념이 빈번히
등장하는데, 실존주의를 정독하지 않은 나로선 조금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있었다.
여하튼, 책은 몹시 흥미롭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끊임없이 드는 생각.
<제2의 성>은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시작된다.
"남자들의 여자들에 관해 쓴 모든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심판자인 동시에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물론 일리가 있다. 역사적으로 남자는 여자를
협력적 존재나 동지가 아닌 지배 대상, 극복 대상인
공포스러운 '타자'로 인식해왔다. 그것은 마치 대학 합격자가
수능을 앞둔 고교생들에게 '대학 가지 마. 한국의 대학 제도는
쓰레기 같으니까. 수능을 거부하라구' 하고 조언하는 것처럼
한계가 자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남녀는 영영 닿을 수 없는 타자로
머물게 된다. 각자의 투쟁에 몰두하는, 시니컬하게 이성적인
활동가들처럼 각자의 영역을 엄격히 지키며 간섭을 거부한다.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얘기하는 거야? 그래봤자 너는
여(남)자가 아니고, 여(남)자의 고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잖아?'
하는 진영논리의 굴레를 보고 있노라면 새누리당에 포섭된
경상도와 나머지 지역을 분리하여 각자 독립하자는 주장처럼
동성으로 결집하고 이성을 배척하는 기운마저 느껴진다.
나는 누군가를 성으로 인식하는 게 몹시 빈곤한 규정 방식
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대단히 편협하고 개인을 성 역할
범주에 가둬 그 외의 가치는 거세시키는 재단이다.
그러나 각 성은 역사를 축적해오면서 서로 다른 문화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것은 탐구하고 동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물론 가부장제와 현모양처 신화, 상남자 문화와 같이
억압적이고 착취를 정당화하는 성 담론을 문화라는 미명으로
포장해서는 안될 것이지만 호모 포비아의 반대격으로
이성간의 교류를 가로막는 경직성은 실질적인 해방,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최종 목표이자 지배와 억압이라는
오랜 테제 속에 투쟁해온 세력들 공통의 희망일 텐데,
을 방해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톨스토이의 공동선이란 개념은 모두
다시 고민해봄직하다. 그가 일생에 걸쳐 호소한
공동선이란 남녀, 농노와 지주,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급을
초월한 인류 전체에 해당하는 사랑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아내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지만...)
사랑은 어떠한 논리와 억압에 굴종해서도 아니되고,
대상을 강요하거나 한정 지어서도 아니된다.
물론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들과 반응들을
생각해보면 갈 날이 멀긴 하지만...
페미니즘이 목표가 당면한 편견과 차별의 폐지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전복을 위한 것임을 다시금 정립하고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늘도 르 듁시메 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