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girl's diary

핸드폰을 두고 나무를 하러

또복 2015. 12. 13. 20:20

 

1.

일본어 공부 겸 줄곧 듣던 "모노가타리" 시리즈가 끝나고 별 수 없이 라디오를 며칠간 듣고 있는데 문득 드는 생각. 팝이란 것은 이제 더 이상 대중 문화가 아닌 세대적 집단 표상과 경험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에 대한 실례로, 라디오에서 주로 선곡되는 팝은 과거 60년대 이후부터 한국 문화에 유입된 영미권 노래를 통칭하는 "팝송"이다. (물론 간혹 최신 해외에서 유행 중인 "노래"를 소개시켜주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팝송"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개별적인 "싱글"의 지위에 머문다. 이것은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과거의 음악 청취 방식이 완전히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며, "록스타"나 "기록적 판매고를 기록하는 싱글" 등등의 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거다. 음악이 세대적, 지역적, 세계적 문화로 확장되는, 음악 창작자가 시대를 반영하는 영웅의 위상으로 도약하는 시대는 끝났다. 추측컨대 문화적 록스타의 마지막은 블러와 오아시스가 경쟁하던 90년대 초이며, 라디오헤드의 등장으로 그러한 구조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이른바 "7080", "올디즈 벗 구디즈" "팝송"이 라디오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해당 세대(2차 베이비붐 세대)가 가장 충실한, 또는 유일하게 잔존하는 라디오 청취자들이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으론 노래로 특정 시간을 폭넓게 공유하는 경험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조금 슬퍼졌다. 가령 나의 20대 초반을 뜨겁게 울렸던 영웅들의 음악, 스미스, 블러, 영국의 기타 록과 미국의 인디 록, 일본의 피쉬맨즈와 슈게이징 록 밴드들은 물론 그 당시의 친구들로부터 잔잔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겠지만 만 명이 넘는 한국의 시민들과 열창할 순 없을 것이다. (당연히, 비시 캠프라이트라거나 보이프렌드스 데드와 같은 음악이 평일 두 시 93.9 CBS 음악FM에서 흘러나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솔직하게 이 점이 가장 속이 쓰리다) 반면 이와 같은 경향은 포괄적인 라디오 전파 대신 지엽적인 인터넷 개인 방송이나 팟캐스트를 등장하게 했다. 과거의 사회 구성원들을 움직이게 한 준거 틀이 대의적인 거대서사라면 오늘날의 아비투스는 취향과 소재, 결국은 소비로 귀결되는, 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행 의미로서의 "팝"은 끝났다. 무슨 소리요, 우리에겐 빅뱅과 엑소와 초아니 하니 등등의 아이돌이 있고 이에 환호하는 세계 전역의 팬들이 있는데 팝이 끝났다는 둥 공공의 기억이 끝났다는 망발은 어느 근거로 나오는 거요, 하고 따질 수도 있겠다. 맞는 말이고, 거기엔 추가적인 고찰이 따라야겠지만 강변에서 공장 동료들과 산울림을 부르고 대학 가요제 테이프를 겨우 구해 듣고 농성의 현장에서 상록수를 함께 부르며 그려내던 공공의 풍경은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팝은 역사적 축적을 거부하므로, 소비는 기억되지 않는다. 상품은 교환된다, 위아래위위아래를 아무리 목청껏 불러도 그것을 훗날 떳떳하게 추억하는 소비자는 없을 것이다.

 

2.

어제는 가장자리 협동조합 주최의 사회적 책읽기 모임에 참석했다. 10분 정도 늦게 도착한 장정일 씨는 무척 화가 난 얼굴이었고, 급히 뛰어온 탓인지 연신 땀을 흘렸으며, 신문 컬럼란의 사진보다 고단하고 수척해 보였다. 그는 모임의 주제와는 상관없이 대뜸 "위안부-매춘부" 논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열렬히 주창했고, 그에게서 여실히 느껴지는 분노와 수척함의 원인은 바로 그 탓 같았다. 한국 학계 풍토에 격노하면서, 젊은 저널리스트처럼 펜으로 그들을 고발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내비쳤다. 아마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아보며 두문불출한 채 면도도 잊고 온통 그 문제에 골몰했겠지. 때문에 그는 모임의 주제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쓰던 글을 마저 쓰고 싶어 안달이 난 소년 같았다. 강의실에 모인 열 명 남짓한 인원들은 진지했고, 성실하게 장정일 씨의 말을 경청했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부터 피 끓는 청년까지, 다른 무엇보다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있어 즐거웠다. 사실 사회적 책읽기 모임이란 것이 뭘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 모임이 토론회인지 강연회인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구석에 앉아 팔짱을 끼고, 대신 구경했다. 사무실과 강당과 사람들. 분명 무언가를 함께 그리고 싶은, 상상하고 싶은, 같은 곳을 보고 싶은 사람들과 그것을 가닿고자 노력하는 일은, 설령 언제나 불발에 그치고 불가능에 대한 덧없는 노력이라 비관하면서도, 아름답고, 어쩌면 삶에 내팽개쳐진 인간이 할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 아닐까.

 

3.

아, 그런데 가장자리 협동조합 가는 길은 너무 불친절했다. 심지어 길가에 그곳을 가리키는 어떠한 표시도 없었다. "말과활 아카데미"란 파란색 플랜카드가 전부였는데, 그곳이 가장자리의 본부인지 별도의 강의실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강연이나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나 하다 못해 시간과 장소만 적힌 A4 용지조차 없었다. 찾아올 사람은 어떻게든 찾아온다, 는 식이었다. 어쩌면 트위터나 페이스북 친구들이 많은 사람들은 어렵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는데 나처럼 친구도 없고 염병할 SNS도 안 하고 심지어 2G폰을 고집하는 구식 인간에게는 매우 유감스러운 외관이었다. 건물엔 불도 켜져 있지 않았는데, 사채꾼 우시지마 같은 놈들이 채무자를 족치고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여서 계단 중간에 내려왔다. 거리 끝까지 갔다 온 다음에야 그곳이 맞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문은 꼭꼭 닫혀 있었고, 실내는 아늑했다. 갑자기 신촌 쓰레기장에서 불란서 리오따르 교수님 서재로 들어선, 마법적인 순간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안과 밖의 구분, 안에서 보는 풍경과 밖에서 보는 풍경의 불일치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좀 더 다듬어서 쓸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겠다. 아주 조금의 노력으로 이런 불쾌한 인상을 해소할 수 있는데 가장자리 관계자들에게 촉구하는 바이다. 화장품 가게나 전당포도 아닌데, 다른 무엇보다 사회문화적으로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과 단체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 기분이 나쁘다. 머리와 입은 치밀하고 바쁜데 문화공학적으론 언제나 빵점이다.

 

4.

성당을 갔다. 갈 때마다 감읍하며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웃기겠지만, 아무튼 이번 미사는 아주 고요한 마음으로, 솔직히 다른 생각도 가끔 하면서 보냈다. 나는 신자가 아니다. 앞으로 세례를 받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 여기 왜 나오슈? 하고 교구 반장님이 흘겨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신자가 아닌 내가 성당에 꾸준히 나오는 것은 일종의 애걸복걸이다. 절망적인 걸 안다. 하지만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희, 망, 하고 발음하는 거 말고 아무튼 개싸움을 벌여야 한다. 나중에 그래도 하느님한테 죄의 용서를 구하면서 '저는 그래도 이 정도는 해봤시유' 하고 발뺌용이랄까. 나한테 성당 미사란 그런 의미다.

 

5.

신자가 아니라서 국수를 안 줬나? 농담이다. 항상 미사가 끝나자마자 쌩 빠져나왔는데, 오늘은 "구경"을 하고 싶었다. 미사가 끝나고 복음을 전파하러 가라고 할 때 혼자 성당에 남아 잠깐 묵상을 올린 다음, 잊지 않고 내게 악수를 청한 신부님에게 조금 감동했다, 1층 식당에 내려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사람들은 미사가 끝나고 뭘 할까, 궁금한 걸 보고 싶었는데 일단 커피가 없었다. 식사 준비로 모두 바빠 누구에게 물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나는 머그잔에 냉수를 마시면서 구석에서 홀을 보았다. 오늘의 식사 메뉴는 잔치국수였다. 고명이 잔뜩 들어간 국수 그릇에 남자 신도들이 돌아다니면서 육수가 든 주전자를 기울였다. 활력이 있었다. 신부님은 어느 노신사와 달력을 보며 무슨 대화를 한참 했다. 성탄절을 앞두고 신도들과 준비할 게 있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있는 부엌을 향해, 꼬마 여자아이가 계속 "나는 왜 국자가 없어?" 하고 물었다. 이건 정말인데, 화가 나거나 꽁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는 건데, 한참 서있는 내게 누구도 국수 먹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그렇다고. (쓰고 나니 좀 속상하네) 성당 밖에는 아기 예수를 기념하는 장식,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의 마굿간이 있었다. 그런데 아기 예수는 없었다. 그 자리는 비어져 있었다. 가만히 구경하고 있는데, 어느 여신도 분이 다가왔다. 성탄절이 오면 아기 예수도 여기 오냐고, 그러니까 마굿간의 빈 자리에 오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이곳에서 본당으로 옮긴다고 대답했다.

 

6.

어제 합정에서 산 타르트, 이것저것의 온갖 베리들이 얹힌, 를 할머니와 함께 먹고 집에 돌아왔다. 공부나 책이 손에 영 잡히지 않았다.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무를 하러 나갔다.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