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girl's diary

14년 10월 26일

또복 2014. 12. 14. 18:45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TV판 시리즈를 보았다.
여러 모로 생각을 정리할 수 없는 요즘인데,
나름의 단상들을 뒤죽박죽 메모해보고자 한다.
(이는 결코 순서를 뒤섞은 이 작품의 진행 방식을
염두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나는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무척 아쉬웠는데,...
그 이유는 내가 정말 좋아할 소재와 설정이 범람함에도
강한 쥬이상스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여러 요인들 때문이다.
나는 고민 끝에 그 이유를,
"스즈미야 하루히는 우울하지 않다. (혹은 우울하지 않았다)"
는 한 문장으로 요약해본다.

"소녀의 우울"을 여러 장르적 상상력으로 이끌어낸 것은
분명 이 작품의 탁월한 지점이자 셀링 포인트일 터이다.
(나는 이 작품에 대한 사전지식과 위상을 모른 채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아무튼 꽤 유명한 작품일 거란 추측뿐이다)
나를 위해 이 작품의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스즈미야 하루히는 세상을 창조하는 힘을 가진 아이인데,
(이 사실을 그녀는 모른다. 그녀 역시 불현듯 이 능력을
선물 받듯이 얻게 된 것이다)
세상은 그녀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강한 영향을 받는다.
그녀의 호오와 취향, 선망하는 강도에 따라 세상은
극단적으로 소멸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그녀의 바람을
그대로 반영하는 정도로 구현된다.
외계인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면 실제로 외계인이
등장하는 식이다. (물론 여기의 외계인이란 그레이형의
전형적인 외계인의 외양이 아닌 휴먼 안드로이드 타입이라
아무도 그가 외계인인 줄을 모르고, 당연히 하루히 역시
외계인이 자신의 눈앞에 나왔다는 사실도, 자신의 소망이
실현되었다는 사실도 모른다)

실로 괴물 같은 능력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고교 진학 후 같은 반에서 만난 "쿈"이란 소년과의 인연에서
발단을 이룬다. (사실 이것 역시 하루히 그녀의 열망의
발현이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을
염원해왔던 것이다. 물론 작품의 화자인 쿈으로선 황당할
노릇이다. 그는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존재해왔고,
그녀의 열망을 이루어주기 위한 목적은 전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후 설명할 이 망상의 주체를 의심케
하는 대목인데, 조금 뒤에 설명하겠다)
쿈과의 만남을 통해 하루히는 미스테리 동아리 격인
"SOS단"을 결성하고(한국판 애니에서는 "세상을 오달지게
흥분시키기 위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단체"라고 번역했는데,
별로 좋은 번역 같지는 않다) 이후 독서광의 과묵한 소녀와
하루히의 성적 노리개라 해도 과언이 아닌 백치미 소녀와
실눈의 훈남 소년을 차례로 단원으로 맞이한다. (당연히,
모두 미소녀, 미소년이다)
이 평범한 청춘물(사실 그냥 쭉 평범해도 좋았을 것이다)은
사실 이들이 알고 보니 저마다 외계인, 미래인, 초능력자였고
하루히의 정체와 그녀의 우울로 인한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쿈에게 설명하면서부터
미소녀 SF 판타지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이후의 이야기는 "하루히의 장단을 맞춰주다 결국 멸망이
도래하고 최후의 결정을 떠안은 쿈의 선택은?!" 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페르소나> 시리즈를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이다.
<페르소나> 역시 학교라는 공간과 관계 속에서 발발한 갈등을
판타지란 장르적 요소로 극화시켜 풀어낸다는 점에서
<스즈미야>와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페르소나>는 게임이라는 특성과 맞물려(이 시리즈의
플레이 시간은 실로 압도적이다. 게임 캐릭터와 함께 늙어가는
기분이 들 지경이니까) 관계에 이입할 물리적 시간과 황당무계함을
견딜 논리적 타당성을 보장해준다. 또한 <페르소나>는 관계라는
요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세상은 관계맺음이
중요하고 우리의 참된 행복은 유대에서 비롯된다'는 선명한
주제의식은 장시간의 게임에 노출된 유저들에게 거의 각인되다시피
할 정도다. 물론 나는 두 작품을 비교하며 우월을 논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스즈미야> 역시 미소녀, SF, 판타지, 하이틴 로맨스 등의
장르를 방법론 삼아 관계에서 비롯된 삶의 비밀을 (소극적으로나마)
풀어헤치고 있다는 나의 해석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세상을 조작하는 인간의 우울(극중 인간의 인식에서 세상은
존재한다는 유아론(唯我論)과 프로이드의 멜랑콜리 개념이 언급된다)이
작품이 전개되는 와중에 어느 순간 실종된다는 게 나의 아쉬움이다.
물론 이야기는 '하루히의 우울'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그 우울의 근원과 규정에 대한 고민은 두리뭉실 사라지고
남은 것은 우울의 반대급부에 있을 (의심되는) 웃음뿐이다.
애니메이션에 너무 많은 걸 바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마 아래로 언뜻 보이는 속옷과
미소녀들의 과장된 육체를 보자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은 또
아니잖은가. 더군다나 신형철 씨의 말에 따르면 작품을 읽는
방식엔 주석(팩트), 해석(의미), 배치(새로운 가치 창출)가 있다고
했다. (물론 그의 해석학적 비평 방식에는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선 함구하기로 한다) 나는 <스즈미야>를 단순히 청춘드라마가
아닌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그것이 존재
한다면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그 주제가 미약하거나 내가 모르는 곳에 숨어있다는
것 같다는 것이다.

하루히는 친구들을 만났지만 그녀에게 친구와 그들로부터의
유대감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그녀는 줄곧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있으며 친구들은 그 망상을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녀의 우울은 새로운 시도와 활력,
당장 무언가 할 게 있다는 목적과 나는 하고 있다는 주체의식으로
잠시간 무마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따분한 일상으로 다시금
편입되고 그녀의 우울이 다시 도진다. 그리하여 우려하던 멸망이
찾아온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쿈이라는 설정인데,
하루히는 본인도 모른 채 세상을 뒤엎을, 거의 신적인 존재고
이를 '연애'라는 다소 김새는 방식으로 구해낸 쿈은 영웅적으로
키스를 해내 하루히의 우울을 잠재운 것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우울에서 벗어난 것은 하루히가 아닌 쿈이다.
하루히의 적극적인 꼬드김(물론 쿈은 못 이기는 척 끌려다니지만)에
그는 동아리를 시작했고, 친구들을 얻었으며, 청춘의 추억들을
만들고, 결국 연애로 마무리지었다.
이러한 대목은 '사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하루히가 아닌
쿈의 우울과 망상이 아닐까' 하고 상상하게끔 한다.
황당한 존재들의 갑작스런 등장과 이계로의 여행, 세상의 균열 등을
마주할 때 그가 유지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덤덤한 태도는
이러한 의심을 가능하게 한다.
하루히는 물론이고, 하루히의 열망으로 등장(혹은 존재)하는
외계인, 미래인, 초능력자는 어쩌면 쿈의 열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애니메이션 자체가 쿈의 망상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쿈이라고 대변된 남성의 보편적이고 시대적인 갈망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과잉됐다 싶을 정도로 화려한 미소녀들과는
달리 지나치게 수수하고 몰개성적인 쿈의 외양과 설정은
이 애니를 소비할 관객층에 대한 명백한 배려라고 난 생각한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어린 시절 관객들로 가득 찬 야구장에서
느낀 소외감,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나는 한 사람에 불과하고
나란 존재는 (저들처럼) 독창적이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사회를 기능하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현대 사회의 존재론적 회의에서 비롯된다.
사실 이는 쿈에게 더 부합되는 설명인데, 그는 여동생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하지만 그 여동생 역시 너무 큐티하고 어여뻐서
장르 속 여동생의 망상에 가까운 존재다) 어떠한 설정도 삭제된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에서 쿈에 자신을 이입한 남자 관객은 많을 것이다.
하루히, 아니 쿈의 우울은 '오늘날 나는 특별하지 않고,
내가 사라진다 해도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정리할 수 있을텐데, 이러한 우울(투정이랄까, 타당한 소외감이랄까)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상황들이 이 애니메이션의 주를 이룬다.
하루히(=쿈)은 특별한 존재고, 세상은 그에게 달렸다.
하루히(=쿈)은 재능을 가졌고, 세상은 그를 인정한다.
하루히(=콘)은 인덕을 지녔고, 세상은 그를 원한다.
(한편 <페르소나> 역시 주인공이 평범한 남학생이고,
아무렇지 않게 사건에 휘말려 영웅이 된다는 설정,
또한 친구들이 이상할 정도로 모두 그를 좋아한다는 설정은
관계에 허덕이고 목말라하는 오늘날 우리의 망상 대리인으로
그를 움직이게 한다)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줄곧 들던 이 의심이 결론에 이르러
확신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하루히는 우울한 적이 없다고
생각해버렸다. 만약 이 작품에서 우울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 작품을 재미있게 보는 나뿐이고,
이 작품을 통해 관계의 갈증을 해갈(했다고 착각)하는 나뿐이다.
그 순간 <스즈미야>는 결말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의 환상이 무너지고 냉정한 실제가 드러난다.
그 붕괴의 의의에 나는 호오를 따지지 않겠다.
다만 이 붕괴를 외면하고 하루히의 부르마에 집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울이다. 아니, 그것은 우울이 아닌 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