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위한 미완성 비극
어제 당직 근무 간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2부를 읽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이 책은 총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익히 예견된 바대로 드미트리는 그루셴카를 둘러싼 아버지와의 갈등을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종결짓고
그야말로 정신적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데, 2부에선 이 과정이 광기 어린 미챠(드미트리의 애칭, 러시아 사람들은
정말 수만 개의 애칭을 갖고 있다)의 심리를 따라 폭풍우처럼 소설이 전개된다.
알로샤나 이반, 조시마와 같은 정적인 인물들의 고요한 심연을 따라갈 때와는 전혀 다른 톤과 템포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읽는 독자 역시 미챠의 불안하고 형벌과도 같은 혼란의 도가니탕으로 입수하는 그런 기분.
이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능청스럽게 구사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필력이 압도적으로 느껴지는 대목.
한편 퍼뜩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가 떠올랐는데, 광범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두 문인의 기질과 차이를 느낄 수 있어 흥미롭다. 톨스토이는 명상하듯,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소설을 구성한다.
그에게 있어 구성은 문학의 중요한 지표이다. <안나 까레니나>의 비평에 대해 그는 "이 소설은 구성적으로
완벽하다"고 자신있게 말했을 정도이다. 톨스토이 문학을 계승했다고 알려지는 마르탱 뒤가르의 연작
<티보 가의 사람들> 역시 구성과 과학적 접근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반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광기와 심연(심리의 층위를 넘어섰다)에 집중하고
이를 발작하듯 몰아친다. 이는 종교적 지점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발화하는 두 사람의 작품 속에서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톨스토이는 내적으로 완성된 하나의 종교적 이상을 '주장'한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끊임없이 번민하며 '그래, 고결한 것 좋지. 하지만 난 이렇게
엉망인 걸 어떡해?' 하고 침울한 광기에 그대로 몸을 내맡기는 인간의 나약함을 '토로'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러한 광기를 오롯이 전수받고 작품화한 사람은 내가 보기에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인 것 같다.
(정말 셀린느의 소설은 하나의 문학이라기보다 시대적인 발작이다)
꽤나 힘든 당직 근무였는데, 교대 후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좀 살 것 같았다.
느긋하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헐리우드에서 찍고 미국 배우들이 괴상한 억양으로 러시아 인물들을 연기하는
(그것도 영어로) 짝퉁 러시아 영화 말고 정말 러시아 언어가 난무하는 진짜 러시아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고른 것은 니키타 미할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
안톤 체홉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라고 하는데, 정말 러시아인들은 동일한 문제에 천착하고 매달렸던 것 같다.
삶, 관계, 종교, 계급. 이 인간적인 가치 속에 존재하는 모순을 못 견뎌 광기에 이르는.
이 연극적인 영화의 볼 만한 점은 러시아 여름의 눈부신 풍광과 첫 사랑과의 조우로 발사된 한 남자의
권태에 대한 증오가 점차적으로 증폭되어 어떻게 폭발되느냐, 또 어떻게 마무리되는가에 있는 것 같다.
마지막 결말에 대해 나는 다소 의뭉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짝만 있으면 만사형통 아닌가?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암전된 화면 위로 떠오르는 문구,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회의적인 의미로서의 체념이
아니라 휴머니즘의 옹호로 받아들여지는 묘한 경험까지 할 수 있었다.
역시 인간은 너무 오래 고독에 노출되면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