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girl's diary
14년 10월 6일
또복
2014. 12. 14. 18:37
일전에 언급했던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기나긴 혁명>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제 당직사관의 변덕으로
연등을 할 수 없어 후임의 스탠드를 강탈하여
완독할 수 있었다. 아무튼, 다음부터 발췌 내용.
1956년은 영국에서 '리얼리즘'이 비평 용어로...
사용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그것을
기념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100년간 리얼리즘의
역사는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하고 씁쓸해서 어떤
기념행사라도 아마 대규모 난투극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확인되고 고정되어
전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방법과 태도를 묘사하는 방법이며, 자연스럽게도
그 묘사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교환하고 발전시키
면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평범하고 동시대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의 주류에는
불쾌하고 빈곤하고 누추한 것에 대한 관심이라는
특수한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렇듯 리얼리즘은 부분
적으로는 평범한 부르주아 세계관에 반하는 저항
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리얼리스트들은 나아가
대다수의 부르주아 예술가들이 차라리 무시하고
싶어 하는 일상적인 소재를 선택하기도 했다. 이렇듯
구호로서의 '리얼리즘'은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묘사는 결코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중략)
그것은 행위의 요소로서 사용될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인 리얼리즘은 아니다. 그것이 묘사를 위한
묘사로만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이러한 방법의 본질인
균형을 사실상 파괴할지도 모른다. (중략) 삶의 방식이란
집단도 단위도 아닌, 전체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소설은 분명 진정한 공동체를 요구한다.
즉 개인들이 일이나 우정, 혹은 가족 같은 하나의
관계로만 연결된 공동체가 아니라, 수많은, 서로
얽히는 관계로 연결된 공동체 말이다. (중략)
대부분의 현대소설에서 개인들 간의 연결은
상대적으로 단일하고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이다.
이것은 문학 형식의 변화이기 이전에 이 사회,
적어도 소설사들 대부분이 가장 가까이 접하는
사회의 일부분의 변화이다.
<기나긴 혁명>에서 리얼리즘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제 당직사관의 변덕으로
연등을 할 수 없어 후임의 스탠드를 강탈하여
완독할 수 있었다. 아무튼, 다음부터 발췌 내용.
1956년은 영국에서 '리얼리즘'이 비평 용어로...
사용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지만, 그것을
기념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100년간 리얼리즘의
역사는 너무나 방대하고 복잡하고 씁쓸해서 어떤
기념행사라도 아마 대규모 난투극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리얼리즘은 확인되고 고정되어
전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방법과 태도를 묘사하는 방법이며, 자연스럽게도
그 묘사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교환하고 발전시키
면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평범하고 동시대적이고 일상적인 현실'의 주류에는
불쾌하고 빈곤하고 누추한 것에 대한 관심이라는
특수한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렇듯 리얼리즘은 부분
적으로는 평범한 부르주아 세계관에 반하는 저항
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리얼리스트들은 나아가
대다수의 부르주아 예술가들이 차라리 무시하고
싶어 하는 일상적인 소재를 선택하기도 했다. 이렇듯
구호로서의 '리얼리즘'은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운동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묘사는 결코 여기에서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중략)
그것은 행위의 요소로서 사용될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인 리얼리즘은 아니다. 그것이 묘사를 위한
묘사로만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이러한 방법의 본질인
균형을 사실상 파괴할지도 모른다. (중략) 삶의 방식이란
집단도 단위도 아닌, 전체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리얼리즘소설은 분명 진정한 공동체를 요구한다.
즉 개인들이 일이나 우정, 혹은 가족 같은 하나의
관계로만 연결된 공동체가 아니라, 수많은, 서로
얽히는 관계로 연결된 공동체 말이다. (중략)
대부분의 현대소설에서 개인들 간의 연결은
상대적으로 단일하고 일시적이고 불연속적이다.
이것은 문학 형식의 변화이기 이전에 이 사회,
적어도 소설사들 대부분이 가장 가까이 접하는
사회의 일부분의 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