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girl's diary

한 노래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관하여

또복 2015. 5. 3. 23:16

 

 나는 어제 들은 한 노래를 온종일 흥얼거렸다 :

 그것은 어젯밤 포스팅으로 올린 바 있는 트렘블링 블루 스타의 <Little Gunshot>이란 노래다.

 캐치한 멜로디에 홀려 무의지적으로 되뇌이는 것과 이 '사로잡힘'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가령 EXID의 "위 아래"의 후렴구가 좀처럼 뇌리를 사라지지 않는 것과 "How can you argue with..."로

 시작하는 "리틀 건샷"의 후렴구를 의도적으로 연거푸 부르는 것은 결국 동일한 걸까?

 선정적인 걸그룹에 '눈을 빼앗긴' 이 저속함을 내가 인정하지 못하여 이를 질적으로 양분하는 걸까?

 : 고층적인 미학 의식을 지닌 내가 "이따위" 음악에 홀리다니, 이것은 이 음악, 아니 포르노의 마력 탓이다. 난 죄가 없다구!)

 

 하여 비가 축축히 내리는 일요일 잠깐, 직접 내린 커피와 함께 "한 노래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생각해보았다.

 먼저 한 노래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노래 자체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관계성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노래에 내재된 이미지와 뮤지션의 생애가

 한 맥락으로 얽혀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노래의 이미지와 뮤지션의 이미지가 언제나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택적으로 뮤지션에 의해 차용된 이미지 전략으로 인해 진정성과 파생현실 사이의 괴리는 너무도 심화되어

 우리는 그 둘을 분간할 수 없다.) 

 

 노래의 이미지란 다양한 요소에 의해 자의적으로 상상된다. 멜로디, 음들의 구성, 형식 등.

 그러나 가장 중요한 가사가 우리는 외국어란 제한된 영역으로 은폐되어 있다. 능란한 구사자가 아니면

 외국어 가사를 번역 과정 없이 스무스하게 수용하는 청자는 그리 없을 것이다. 때문에 외국곡을 감상함에 있어

 우리는 굉장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맥락으로 외국곡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시작된 상상이 심화되면 현재 내가 위치한 사회, 위치, 태도로부터 벗어나(이를 탈영토화라 해도 될런지)

 내면의 새로운-상상된 영역(이를 재영토화라고 해도 될런지)으로 발전된다.

 노래의 이미지는 결국 현실에 동기화된 나의 감각을 일순 유리시켜 새로운 영역으로 '탈주'하게끔 돕는 길잡이가 된다.

 

 또 다른 요소로는 존경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내 개인적인 기질일 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지금-여기를 온전히 사유할 수 없는 인간인데, 그 이유인즉 직관이 너무 뜨거워 지금 당장 나를 둘러싸고

 횡행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자시고 할 이성이 지금-여기에 실종되고 만다.

 내가 지금-여기를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뜨거운 직관이 어느 정도 진정된 이후에서다.

 이를 어느 정도 무마하고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은 존경이다. 상대방과 상황에 대한 존경만이

 나를 뜨거운 직관으로부터 건져올려 내 감각을 평화롭게 열어놓을 수 있다.

 

 연애와 마찬가지로, 한 노래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삶을 뒤흔드는 경험일 수 있다.

 우리 삶의 깊이를 부여하고, 총천연색 칠을 하며 의미를 수놓지만 

 굉장한 고통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을 제어할 수 없고, 난도질 당한 마음을 안쓰러이 바라보며 자신의 총체적인 한심함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뜨거운 직관'이 물러난, 지나간 계절을 기억하는, 한참 뒤에나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