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ur girl's diary
14년 10월 10일
또복
2014. 12. 14. 18:39
가볍고 유쾌한 마음으로 <럼 다이어리>를 보았다.
영화 속에서 조니 뎁은 무척이나 근사한 신문기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근사하다는 표현을 택한 이유는,
조니 뎁의 매력이 마구 발산되어서라기 보다,
푸에르토리코의 해변가 카페에서 럼을 마시는 게
부러워서라기 보다,
사회적 사기에 항거하는 뉴욕타임즈(사칭이지만)...
기자라는 역할이 정의감 터져서라기 보다,
영화 속 조니 뎁의 처지가 멋스럽게 보였기 때문.
그의 처지는 딱히 좋다고 할 수 없는데,
그는 럼에 찌들어 결국 환각까지 볼 정도의
엉망진창인 상태이고, 소설을 쓰고 싶어하지만
결국 발표 하나 못한 채 푸에르토리코까지
도망 와 형편없는 신문사에 취직한 글쟁이고,
푸에르토리코 건달들에게 큰소리 하나 못치는
겁 많은 소시민에, 이런저런 악운이 겹쳐
결국 럼 한 잔 살 돈마저 없어 전전긍긍하는,
여타 그를 둘러싼 환경은 이른바 '근사한' 영역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군인이라는 나의 신분은 여기서 차치하자.
'군인인 너는 지금 무엇이든 부럽겠지',
'상병 마인드가 그렇다, 얘' 식의 빈정거림은
당신이나 나나 무익한 대화의 씨발, 아니 시발점이다.
나는 여러 모로 조니 뎁이 부러웠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엉망으로(럼을 이용하여)
망치고 있었으나 그에겐 자신을 파괴시킬 자유가
있었고, 어떻게 파괴시킬지 선택지조차 다양했다.
그곳이 푸에르토리코의 눈부신 햇살과
꿈이 일렁이는 바다와 순박한 주민들이 함께여서,
그것이 파괴가 아닌 아메리칸 드림이나 로망이라고?
글쎄, 자유는 부자유스러울 때 가장 빛이 난다.
가령 당신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광화문,
그 조야한 메트로폴리탄의 뻔뻔한 면면을 가보라.
거기서 당신이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냥 남루하고 피곤할 따름이다. 석관동?
나는 지금 석관동의 마법 같은 지점,
일요일이 공간으로 현현화되고 있는 그 순간을
명백히 기억하고, 되새기고 있지만 실제 그곳을
살아가던 나는 '오늘 반찬은 뭐 먹지?' 하고
기계적으로 자전거를 끌고 병신 같은 석관시장을
헤매던, 항상 숙취에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던
서울 변두리의 비루한 일상에 한없이 허물어지던
것이 고작이었다.
예컨대, 일상이 이상(혹은 그 반대)으로 변모하는
과정, 관광(serching light)이 형식적인 패키지 투어로
전락하는 지점.
군인인 나는 주거지 이동의 자유가 없다.
군인인 내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환상을 전유하는
쾌락이자 고통이라 할 수 있는데,
푸에르토리코에서 타락하는 소설가의 여정이나
히치하이킹 하듯 디종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고학자와
영원한 불륜을 떠나는 부르주아 여성의 모험을
부러워하는 것은 영화를 잘못 보고 있거나
괴상하게 탐닉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관광지로 남을 것을 염원하는 푸에르토리코의
일상은 숙취처럼 깨질 것만 같은 두통의 공간화,
디종에서의 로맨틱한 불륜은 다가올 현실적인
불안(당장 그녀는 자신의 어린 아이를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연인들> 결말, 잔느 모로의 슬픈 얼굴은
다분히 <졸업>에서 결혼식장에서 빠져나와 버스에
오른 두 사람의 현실적인 표정과 일맥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인들>의 불륜과 도피는 일종의
환상 내지는 꿈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험을 앞서
지른 바 있던 안나 까레니나는 스스로 기차에 몸을
던지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선망하는 석관동은 그냥 석관동이다.
일요일마다 염병할 대학생들이 버린 쓰레기들을
치우지 않아 지저분한 거리와 음침한 여인숙들,
게으른 햇빛과 기력을 쇠하게 하는 나른함,
새로울 것 하나 없이 조금씩 침몰해가는 마을.
여기서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러한 회의는 삶을 기대할 만한 게 아닌
비극으로 추앙할 뿐이다.
이곳에서 나의 주된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직도 삶에 기대할 것이 있는가?
만약 기대할 것이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이미 나는 많은 것을 실패했고, 그것이 무용함을
경험했는데 영원히 실패를 되풀이해야 하는가?)
만약 기대할 것이 없다면 앞으로 내게
주어진 이 거대한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어쩌면 나는 군인이라는 신분이 갖는 취약점,
그러니까 섣부른 기대와 자유에 대한 열망이
되돌아올 실망과 좌절과 초조함에 미리 겁을
먹고 두려워 '어차피 세상은 거지 같아.
나가봤자 기대한다한들 전과 같이 술 마시고
비틀비틀 꼼짝도 못 하다 절망만 할 테지'
하고 파괴의 당의정을 두르는 걸지도 모른다)
<럼 다이어리>에서 조니 뎁은 결국 글을 쓴다.
그의 독백을 빌리자면 "자기 목소리"를 찾는다.
그는 끔찍하게 열악한 아파트에서 잉크리본
타자기를 두들기며, 재떨이 위에 올려둔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셔츠 소매를 아무렇게 접어
올린 다음, 책상 위에 반쯤 남은 럼과 벽에
뒤죽박죽 붙여진 사진들과 함께
글을 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고, 과장하자면 쿠퍼액이 찔끔
나올 만큼 벅찬 기분에 휩싸였다.
(푸에르토리코 시골 클럽에서 중절모를 쓰고
블루스를 연주하는 밴드를 볼 때도)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이등병 때부터
꿈꾸던, 많은 걸 잃어버릴 때까지 품고 있던
미래의 단면과 무척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허락된 생애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다
죽고 싶다는 거다. 세계 곳곳에서 우연적으로,
혹은 위대한 문화의 노력으로 발현되고 있는
혁명의 단초들을 직접 보고, 그것을 내 나름의
목소리로 정리하고 싶다.
이론화시킬 수도 있고, 동북아 문화 벨트의
공동체 운동일 수도 있고, 심지어 초국가적
반국경 비밀수사일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횡행되고 있는 변화의 실험들을
주목하고, 그것을 함께 공유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후 어느 정도의 실행과 진척을
보고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군인이기에 갖는 꿈이라고 비웃어도 이제는
상관없다. 나는 이 꿈을 위해 많은 걸 잃어
버렸고, 죽음이 나를 지겨워할 때까지 염세의
문고리까지 매만지다 왔다.
나는 삶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기에
이제는 변화를 위해 남은 삶을 운용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살고, 네가 사는 길이다.
영화 속에서 조니 뎁은 무척이나 근사한 신문기자로
등장한다. 여기서 근사하다는 표현을 택한 이유는,
조니 뎁의 매력이 마구 발산되어서라기 보다,
푸에르토리코의 해변가 카페에서 럼을 마시는 게
부러워서라기 보다,
사회적 사기에 항거하는 뉴욕타임즈(사칭이지만)...
기자라는 역할이 정의감 터져서라기 보다,
영화 속 조니 뎁의 처지가 멋스럽게 보였기 때문.
그의 처지는 딱히 좋다고 할 수 없는데,
그는 럼에 찌들어 결국 환각까지 볼 정도의
엉망진창인 상태이고, 소설을 쓰고 싶어하지만
결국 발표 하나 못한 채 푸에르토리코까지
도망 와 형편없는 신문사에 취직한 글쟁이고,
푸에르토리코 건달들에게 큰소리 하나 못치는
겁 많은 소시민에, 이런저런 악운이 겹쳐
결국 럼 한 잔 살 돈마저 없어 전전긍긍하는,
여타 그를 둘러싼 환경은 이른바 '근사한' 영역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군인이라는 나의 신분은 여기서 차치하자.
'군인인 너는 지금 무엇이든 부럽겠지',
'상병 마인드가 그렇다, 얘' 식의 빈정거림은
당신이나 나나 무익한 대화의 씨발, 아니 시발점이다.
나는 여러 모로 조니 뎁이 부러웠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엉망으로(럼을 이용하여)
망치고 있었으나 그에겐 자신을 파괴시킬 자유가
있었고, 어떻게 파괴시킬지 선택지조차 다양했다.
그곳이 푸에르토리코의 눈부신 햇살과
꿈이 일렁이는 바다와 순박한 주민들이 함께여서,
그것이 파괴가 아닌 아메리칸 드림이나 로망이라고?
글쎄, 자유는 부자유스러울 때 가장 빛이 난다.
가령 당신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광화문,
그 조야한 메트로폴리탄의 뻔뻔한 면면을 가보라.
거기서 당신이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냥 남루하고 피곤할 따름이다. 석관동?
나는 지금 석관동의 마법 같은 지점,
일요일이 공간으로 현현화되고 있는 그 순간을
명백히 기억하고, 되새기고 있지만 실제 그곳을
살아가던 나는 '오늘 반찬은 뭐 먹지?' 하고
기계적으로 자전거를 끌고 병신 같은 석관시장을
헤매던, 항상 숙취에 비칠비칠 걸음을 옮기던
서울 변두리의 비루한 일상에 한없이 허물어지던
것이 고작이었다.
예컨대, 일상이 이상(혹은 그 반대)으로 변모하는
과정, 관광(serching light)이 형식적인 패키지 투어로
전락하는 지점.
군인인 나는 주거지 이동의 자유가 없다.
군인인 내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환상을 전유하는
쾌락이자 고통이라 할 수 있는데,
푸에르토리코에서 타락하는 소설가의 여정이나
히치하이킹 하듯 디종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고학자와
영원한 불륜을 떠나는 부르주아 여성의 모험을
부러워하는 것은 영화를 잘못 보고 있거나
괴상하게 탐닉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관광지로 남을 것을 염원하는 푸에르토리코의
일상은 숙취처럼 깨질 것만 같은 두통의 공간화,
디종에서의 로맨틱한 불륜은 다가올 현실적인
불안(당장 그녀는 자신의 어린 아이를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연인들> 결말, 잔느 모로의 슬픈 얼굴은
다분히 <졸업>에서 결혼식장에서 빠져나와 버스에
오른 두 사람의 현실적인 표정과 일맥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인들>의 불륜과 도피는 일종의
환상 내지는 꿈에 불과하다. 이러한 모험을 앞서
지른 바 있던 안나 까레니나는 스스로 기차에 몸을
던지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선망하는 석관동은 그냥 석관동이다.
일요일마다 염병할 대학생들이 버린 쓰레기들을
치우지 않아 지저분한 거리와 음침한 여인숙들,
게으른 햇빛과 기력을 쇠하게 하는 나른함,
새로울 것 하나 없이 조금씩 침몰해가는 마을.
여기서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러한 회의는 삶을 기대할 만한 게 아닌
비극으로 추앙할 뿐이다.
이곳에서 나의 주된 고민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직도 삶에 기대할 것이 있는가?
만약 기대할 것이 존재한다면 무엇인가?
(이미 나는 많은 것을 실패했고, 그것이 무용함을
경험했는데 영원히 실패를 되풀이해야 하는가?)
만약 기대할 것이 없다면 앞으로 내게
주어진 이 거대한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어쩌면 나는 군인이라는 신분이 갖는 취약점,
그러니까 섣부른 기대와 자유에 대한 열망이
되돌아올 실망과 좌절과 초조함에 미리 겁을
먹고 두려워 '어차피 세상은 거지 같아.
나가봤자 기대한다한들 전과 같이 술 마시고
비틀비틀 꼼짝도 못 하다 절망만 할 테지'
하고 파괴의 당의정을 두르는 걸지도 모른다)
<럼 다이어리>에서 조니 뎁은 결국 글을 쓴다.
그의 독백을 빌리자면 "자기 목소리"를 찾는다.
그는 끔찍하게 열악한 아파트에서 잉크리본
타자기를 두들기며, 재떨이 위에 올려둔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셔츠 소매를 아무렇게 접어
올린 다음, 책상 위에 반쯤 남은 럼과 벽에
뒤죽박죽 붙여진 사진들과 함께
글을 쓴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고, 과장하자면 쿠퍼액이 찔끔
나올 만큼 벅찬 기분에 휩싸였다.
(푸에르토리코 시골 클럽에서 중절모를 쓰고
블루스를 연주하는 밴드를 볼 때도)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이등병 때부터
꿈꾸던, 많은 걸 잃어버릴 때까지 품고 있던
미래의 단면과 무척이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허락된 생애에서 아름다운 것을 보다
죽고 싶다는 거다. 세계 곳곳에서 우연적으로,
혹은 위대한 문화의 노력으로 발현되고 있는
혁명의 단초들을 직접 보고, 그것을 내 나름의
목소리로 정리하고 싶다.
이론화시킬 수도 있고, 동북아 문화 벨트의
공동체 운동일 수도 있고, 심지어 초국가적
반국경 비밀수사일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횡행되고 있는 변화의 실험들을
주목하고, 그것을 함께 공유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후 어느 정도의 실행과 진척을
보고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군인이기에 갖는 꿈이라고 비웃어도 이제는
상관없다. 나는 이 꿈을 위해 많은 걸 잃어
버렸고, 죽음이 나를 지겨워할 때까지 염세의
문고리까지 매만지다 왔다.
나는 삶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기에
이제는 변화를 위해 남은 삶을 운용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살고, 네가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