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 아픈 사람들
1.
어쩐지 그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가령, 어딘가 글을 발표하거나 할 때 나 자신을 무어라 소개할 것인가, 하는.
무직자? 소설가? 독립 연구가? 영상 시인? 활자 노동자? 좌파?
어느 정도 정형화된 직업군에 내재된 상징과 기호 속으로 내 자신이 휘말릴까 무섭다.
정형성을 탈피하기 위해 '별난 소개'를 시도하는 것 역시 우스꽝스럽게 미끄러지는 요즘,
나는 정말 고민이다. 예전에는 '학생'이라 소개하면 그만이었고, 그 어중간함과 과도기성이 좋았는데
이제는 얄짤 없이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오고 있다.
88년생, 남양주 출생, 영화학교 졸업, 모두 싫다.
"몇년도 출생, 파리 정착"하고 유로피안다운 깔끔함을 자랑하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가 프로필을 때운 밀란 쿤데라도 싫다. 온갖 거짓말로 "자소서"를 보낸 뒤 "어느 게 진짜인지 나도 모름"
하고 뒷통수 치는 샐린저만이 내게 큰 위로가 된다.
2.
얼마 전 홍대 서점을 찾아가 "토우메 케이"의 작품을 찾았는데, 비사교적인 오타쿠 행색의 서점 직원은
정말 놀랍게도 "토우메 케이 작품은 현재 이것이것, 그리고 이것이것이, 그리고 이것은 3권부터 있습니다" 하고
또박또박 설명해주는 거였다. 일단 나는 토우메 케이란 작가를 그가 상세히 알고 있는 것도 무척 놀랐고,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서점 내 비치된 수많은 작품(의 위치와 권수까지)을 꿰차고 있는 직업 의식이랄까,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프로페셔널(일반적인 그것과는 조금 다른)에 약간 감동하기까지 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나는 토우메 케이 작품을 여럿 구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1권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97년에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정말 최근, 작년인가, 장장 18년 만에
완결되었다고 한다. 나는 사실 이 만화를 보면서 '이런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여건과 지면이 있다니,
정말 그녀는 복받은 작가군. 역시 일본은 대단해' 하고 생각했는데, 연재지의 몰락과 중단 속에 포기하지 않고,
심지어 2010년에는 소설판까지 직접 냈다, 이 지면 저 지면 옮겨가며 끈질기게 완성한 작가의 근성에 놀랐다)
나는 이 만화를 숙취에 시달리는 가운데 행복한 일만 연이어 벌어지는 날 좋은 일요일 느긋하게 보았는데,
술 기운이 채 떨어지지 않은 내게 이 만화는 나와 무척 닮아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만화의 주인공은 대학을 졸업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말 행사처럼 찾아오는 가스, 수도 끊김과
집세 걱정을 하면서도 (아직까진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취업할 생각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남자다.
만화의 첫 장에는 어두운 새벽, 아직 깨지 않은 그의 방, 어두운 전경이 묘사되는데
거기에는 패밀리 게임기와 다이얼 전화기가 보인다. 집에 놀러온 그의 대학 동창은 이걸 보고 학을 뗀다.
또한 그는 함께 졸업한 대학 친구를 사랑하지만 매사에 적극적인 그녀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자신에 대한 환멸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보다 자신의 현재 처지를 수호하는 게 가장 급선무로 생각하는지
고백하지 않은 채 헤어진다. (물론 그 이후의 상황은 급변하고, 이것이 첫 번째 에피소드 "사회의 낙오자는
자기 혁신(혁명인가, 개혁인가)을 한다"의 주된 이야기다)
내가 흥미로왔던 것은, 토우메 케이, 그리고 주인공 우오즈미 리쿠오는 자신을 '사회의 낙오자'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생각의 근거는 1. 구직 활동 중단. 2. 대졸자임에도 아르바이트 생활. 3. 구식 게임기와 다이얼 전화기로 대변되는
퇴행적인 삶의 방식, 등으로 축약된다. 나는 좀 웃겼고, 항변하고 싶기도 했다.
왜... 왜... 이게 사회의 낙오자지? 나도 이렇게 살고 싶은데...
그런데 남이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곧 들었다.
3.
작가는 가장 먼저 시대에 아픈 사람이라고 한다.
좋은 만화는 본 사람으로 하여금 아프게 한다. (일주일 정도)
나는 계속 앓고 싶다.
성희 누나와 통화를 해서 기뻤다.
팬이 만든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매드무비
イエスタデイをうたって, RCサクセショ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