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연속 스테레오랍
쌍둥이 무역 빌딩처럼, 홍대 전철 역을 나서면 근거리에 거의 마주보다시피 위치하고 있는
두 곳의 만화점, 북새통과 툰크- 이틀 연속 스테레오랍과 함께 하고 있는 오늘밤,
두 곳의 멋진 만화점 가운데 북새통에 관한 나의 짧은 기억을 얘기하고자 한다.
몇 년 전에 나는 홍대를 찾았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볼일을 마쳤을 땐 이미 잔뜩 취해 있었다.
나는 석관동이 아닌 남양주 본가까지 가야 했고, 그 어마어마한 거리와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술이 아마 취해 있지 않았다면 스물 살 때처럼 집에 가는 버스에서 술을 몰래 마시기라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이미 만취해 있었고 술을 더 마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북새통이 눈에 들어왔고, 난 비틀비틀 거리며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사실 북새통보다 툰크를 자주 찾는 편이라 아마 그때가 처음 북새통을 찾은 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난 형편없이 취해 있었고 계단을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인 지경이었다.
심지어 나는 북새통의 전경마저 기억에 나질 않았다. 그냥, 만화가 '좀' 많은 책방이었고,
그곳에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전집이 할인하고 있었고, 그것을 고민 없이 샀다는 것이
내 기억의 전부였다. 그 뿌듯함을 무기 삼아 나는 묵직한 상자를 끌어안고 집까지 쿨쿨 자며 잘 왔다.
얼마 전, 나는 북새통을 다시 찾았는데 (만취 속에서 <불새>를 사던 그때 이후 처음이었다)
우스운 것은 이 오타쿠, 후죠시들의 천국인 지하 벙커 같은 문화 오염 지대에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나는 혼자 볼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두 분은 구태여
나와 동행하셨다. (설마 이런 곳을 찾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셨겠지...)
허나 나보다 깊은 식견과 경험을 지닌 두 분은 별다른 문화적 충격 없이 일상적으로 서점을 둘러봤고,
나는 서재들을 유유히 돌며 딱히 찾는 책 없이 구경을 나섰다.
괜찮고 할인 중인 전집(데즈카 오사무 전집 같은)을 사고 싶었으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고,
대신 카와치 하루카의 작품들이 있기에 두어 권 샀다. 왜인지 부녀자들이 빠르게 저희들끼리 중얼거리며
구석에서 샥샥 책을 고른 후 후다닥 도망칠 것 같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빨간 줄에 19금이란 경고가 있었지만
뭐... <아리송한 꽃>과 <케이크를 사러>.
카와치 하루카의 큰 장기는 살면서 여리여리해지는 순간, 스치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고,
부풀어 오는 동요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런 순간과 삶과 동기화가 너무 잘 되어 강인한 그런 때를
잘 포착해내는 게 아닐까, 하는 몇 권 안 본 독자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뭔가 정형화된 후죠시 문화 틀 안에서 얘기하면 진짜 진부하게 재미없을 것 같고
르페브르의 일상 이론이나 <아빠는 요리사>와 같은, 아름다운 일상계 만화와 삐딱하게 시비 걸듯
함께 얘기하면 좋을 듯하다. (부디 우리 연로하신 부모님 내 서재에 숨겨놓은 두 만화를 보지 않길 바라며...)
그나저나 스테레오랍은 캐면 캘수록 보석일세.
만약 90년대로 다시 돌아가는 기적이 발생한다면,
또 우리에게 보다 깊은 사유와 미적 감각이 존재한다면
도래할 유토피아의 디스코 씬은 스테레오랍이 지배할 것이다.
95년, 뉴욕 센트럴 파크 공연을 촬영한 이 영상은 모든 것이 예술을 이룬다.
"존 케이지 버블껌"이란 제목의 다른 라이브 동영상을 찾아보면
달력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굳이 비좁게 모여 연주를 하는 클립이 있는데, 그것도 좀 웃긴다.
아름답고 슬프도다. 진정 비극이란 내가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
내가 알던 야생 호랑이들은 모두 건강할진저.
Ronco Symphony + John Cage Bubblegum, Stereo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