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삼각대 문우들과 전설적인 술자리를 또 가졌을 때, 그때 호쾌하게 권했어야 했는데 못한 말. (사실 우리는 항상 벼르고 벼르다 서로를 만나 각자 준비한 얘기의 삼할도 꺼내놓지 못하고 분위기에 넘어가 술을 퍼마시고 종국엔 기억을 잃는 식으로 술자리를 마감하는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고 담론을 발전시킨다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라든가 들뢰즈와 가타리라든가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콤비들처럼 굉장한 지적 센세이션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한편으론 이 소주적 감정 없이 불처럼 뜨겁게 언쟁하는 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때 나는 제안하고 싶었다. 미친 대작전을. 가족, 여자친구, 절친들을 모두 모아 스키 리조트를 가자고. 우리 중에 스노 보드를 멋들어지게 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키장 쿠폰을 끊고 겨울을 맞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영삼과 생트 마리 해변처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바로 스키장과 삼각대 문우 아닐런지? 난 여전히 그런 미친 유대적 순간에 대한 애착이랄까, 갈망이 있나 보다. 그렇게 데이고도 매달린다. 조른다. 아직도 좋니? 하고 주변 친구들이 뭐라 말은 못하고 한심해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그런 자리가 좋다. 평생 잊지 못하는 그런 하루가 나를 살게 한다. 아무튼, 그때 이 얘기를 취한 김에 빼도 박도 못하게 정했어야 했는데.
어제 다리 운동을 하면서 음, 내일 근육이 좀 당기겠군, 하고 예상하긴 했지만 아침부터 몸이 안 좋았다. 깨진 전구처럼 자글자글 온몸이 박살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집에 혼자 남게 되자 대놓고 끙끙거리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재즈, 나는 얼마 전부터 올레 티비의 재즈만 틀어주는 사티오 재즈 명반 1001선인가 하는 방송을 곧잘 듣고 있다, 를 들으면서 한 겨울 오전부터 몸이 안 좋아 침대에 누워 있노라니 군대 생각이 많이 났다. 마지막 겨울을 보내며, 나는 무척 아팠던 것이다... 지독한 감기였지만 나는 병장이었다. 나는 출근 도장만 찍고 바로 생활관으로 올라와 어둠 속에서 잠을 잤다. 군화도 벗지 않고... 시디 플레이어로 케니 드류, 듀크 조던의 피아노를 들으면서...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의 피아노를 들으면 그 선명한 기억의 풍경이 떠오른다. 하얗게 눈이 쌓인, 그 위로 오전의 눈부신 빛이 내리쬐고, 바쁜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노곤노곤한 감기의 감각, 살얼음처럼 아슬아슬하게 회화를 그리듯 건반을 오가는 두 피아니스트들, 현란한 연주 속에 숨겨진 아주 심플한 '오리지널 테마', 꿈의 고원처럼 새하얀 눈밭 위에 서있는 듀크 조던 사진을 쓴 시디 재킷까지. 꺼내 보면 꽤 많은 군대에서의 아름다운 기억. 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40분 가량을 잤다. 더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되기에 소리를 지르며 억지로 힘을 냈다.
스즈키 토미의 <이야기된 자기>를 다시 읽고 있다. 다시, 라고 하니까 예전에 독파했던 애독 서적을 다시 읽는 느낌인데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문학 관련 수업 때 하루키 소설을 갖고 리포트를 썼다가 강사가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 썼다는 식의 적절한 지적이었는데 어쩌면 내 인문학적 열등감과 트라우마의 근원이 거기서 도드라진 게 아닐까? 아무튼, 그러면서 권했던 책이 토미(Tommy가 아니라)의 책. 나름 유명해서 다른 사람 집 서재에서도 많이 봤다. 윤형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앞서 말했듯이, 가족이 외출하고 나만 남은 집에서, 침대에 반쯤 누워, 사티오 재즈 방송을 들으며 이 책을 읽고 있고, 괜찮은 재즈가 나오면 책 양장본 안쪽에 제목을 기입하곤 한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는 연필은 3H의 심이 아주 연한 것이고, 양장본은 아주 고급 용지라 써도 빛에 굴절시키지 않으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간에. 그런데 어느 불란서 재즈 싱어(여성)가 부른 플라이 투 더 문의 불란서 버전을 들으면서, 왜 불어는 노래로 들으면 그닥 감흥이 없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불어의 일상 회화 자체가 이미 음악성으로 충만해서일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그 가수의 노래가 그냥그런 수준이어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푸시 캣이라거나 프란시스 골과 같은 1960년대의 샹송 스타들을 들으면 또 얘기가 달라지니까.
뭐, 그런 얘기입니다. 어서 난로 때우고 싶다. 한 시간 넘게 키보드를 치는 내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점점 곱는다. 그리고 문득 평생 가족과 같이 살면서 내 방에 틀어박혀 글만 써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소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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