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징후적인 나날들이다.

 외출을 틈타 바람을 쐬려는 나의 잔꾀는 결국 정기 휴가의 이틀이나 날려먹는 참사로 되돌아오고,

 저주에 걸린 듯 저녁 청소와 인원 보고를 정하는 가위바위보에서 쉼없이 지고 있다.

 이건 마치 <사랑의 블랙홀>의 빌 머레이가 교훈을 얻기 전까지 계속 하루를 되풀이하는 마법과도 같다.

 나는 이 길고 긴 겨울, 5주가 꽉꽉 들어찬 1월 동안 무엇을 찾아야 하고, 어떤 변화를 꾀해야 하는가.

 

 지난해의 마지막 당직 근무는 상정이 형이 빌려준 <뉴로맨서>와 함께 했다.

 윌리엄 깁슨의 SF 소설은 내가 전부터 무척이나 읽고 싶어 하던 하드SF 장르 소설의 전형이어서

 큰 만족감을 느끼며 읽었다. 하루가 지나가기 전에 휘익 다 읽어버렸으니 굉장한 독파력 아닐까.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을 내가 전부 이해했다고 할 순 없으리라. 그 현란한 기호와 상징 체계, 약물과 첨단기술을

 넘나드는 스타일들은 보기만 해도 (절망적인) 미래 여행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냥 (절망적인 미래는) 그렇구나, 하고 대충 이해하기로 했다. 물론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기호들을

 하나하나 분석해가면서 자본주의 사회 속의 붕괴하는 현상들, 이념적 풍경들을 따져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작업일 테지만 선뜻 나서질 못하겠다. 하지만 윌리엄 깁슨이 컴맹인 상태로 이 책을 썼다는 것은

 무척이나 내게 용기를 준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1박 2일 휴가 때 구리에서 어머니와 본 <인터스텔라>와 <뉴로맨서>에서 공통적으로

 묘사되는 "분노"라는 지점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을 가족으로부터 떼어내어 우주로 날려버리는데

 성공하는 노학자는 멀어지는 우주선을 향해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란 내용의 시를 읊고, 이 시는 계속 되풀이되어 영화의 주제로 뚜렷하게 남는다.

 <뉴로맨서> 역시 분노는 주인공을 움직이는 아주 묘하고 야릇한 요인이다. 육체를 하나의 감옥으로 인식하는

 사이버 카우보이 주인공은 근대적 인간성, 휴머니즘에 대한 모든 관습과 요소들을 경멸하고 멀리한다.

 그에게 인간, 신체, 감정이란 불필요한 것이고, 비효율적이며, 폭력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 그것으로 그는

 많은 상처와 실패를 겪었고, 그 유일한 대안은 오로지 완벽한 내적 일관성으로 유지되는 사이버 스페이스,

 사이버 스페이스와의 혼연일체를 이루는 사이버 카우보이의 삶이다. 부침을 겪던 그는 사이버 스페이스 세계를

 관장하는 거대한 실체의 민낯, 그가 추종하던 완벽함, 인간성이 거세된 인공지능을 마주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공지능과 사이버 스페이스를 자신의 손으로 박살내야 하는 임무 아닌 임무, 살해 아닌 살해, 자살 방조를

 수행하게 된다.

 

 <인터스텔라>에서 분노는 답을 찾아야 생존할 수 있는 나약한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이다.

 가공할 만한 자연과 우주 속에서 길을 잃고, 인간에게 배신을 당해 어둠으로 맥없이 끌려가기 직전

 그런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결국 분노였다. 여기서 분노는 비단 증오만이 아닌 애증의 양면적인 지점,

 인간의 풍부한 감정적 색채를 포함하고 있다. 머피의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존경-배신-증오-사랑으로 이동한다.

 영화상에서 인류를 구원했다고 할 수 있는 (시계를 잘 관찰한 덕분에) 머피의 동력은 결국 인간적 감정의

 막힘없는 순환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노학자와 아버지에게 느낀 배신감에 무너졌다면, "분노하라"는 시의 숨은 뜻을

 파악하지 못했다면, 그 망할 시침의 까딱거림 속에 블랙홀의 양자 정보를 캐치하지 못했다면 천식으로 다 죽었을 것이다.

 

 <뉴로맨서>에서 분노는 더 복잡한 층위로 등장한다. 육체에 갇혀 약물을 통해서만 자유를 경험할 수 있던 케이스는

 우여곡절 끝에 사이버 스페이스로 복귀를 한 후에도 (세계를 구동하는 실체에 접근할수록) 무력함을 느낀다.

 설상가상 수술 덕분에 그는 더 이상 약물 중독의 환각 체험마저 박탈당하고 만다. (나중에는 또 다른 약물을 찾아내지만)

 그를 둘러싼 세계가 붕괴하는 악몽 속에서 그를 붙잡고 함께 녹아내리는 것은 그의 얼마 없는 인간적 기억,

 지바 거리에서 만난 린다와의 기억, 바텐더 래츠를 비롯한 폐기물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미래 일본 도시에서의 군상들이다.

 인간성이 거세된 사이버 스페이스와 기술 사회는 케이스의 이러한 인간성을 약점처럼 집요하게 이용한다.

 이미 살해된 린다를 다시 복원하여 계속 등장하게 하고, 추억에 호소하고, 과거의 장소를 보여준다.

 케이스는 그때마다 "이건 진짜가 아니야"면서 총질을 하고 강하게 부정하지만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란 말인가?

 정교하게 짜여진 매트릭스 수백의 틀 위에서, 그 심연을 파고들수록 다시금 환원하는 우주-신체-심리의 뫼비우스 띠를

 구분하기에 인간의 정신은 너무도 편협하고 유한하다. 세상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지점에서 케이스 앞에 선

 인공지능 "뉴로맨서"는 이 모험-자기살해를 주문한 또 다른 인공지능 "윈터뮤트"와 판이하게 대비되는 존재다.

 "윈터뮤트"가 끝없는 자기발전을 통해 극한으로 도달한 이성의 영역, 결국 인공지능과 기술사회, 인간의 반대점을 대변한다면

 "뉴로맨서"는 인간의 신경, 감각, 기억, 그 불안하고 주관적이며 나약하면서 강력하고 모순적이고 정의내릴 수 없는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일 수 없는 그 무엇을 대변한다. 윈터뮤트의 뉴로맨서 살해, 이를 실행에 옮긴 인간

 (동시에 모든 신체가 탈부착되었으니 인간이라 더 이상 말할 수 있을까?) 케이스의 추억 살해는 종언과 개시다.

 그를 움직이던 분노, 인간성의 마지막 근원은 자신의 의해 힘차게 살해되고,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회의적이고 

 건조하게 묘사된 미래 사회는 더욱 완벽하게 규제되고 통제된 매트릭스의 풍경과 다름 아니다. 

 

 생각없이 본 두 작품에서 "분노"가 공통적으로, 또 조금은 다른 뉘앙스로 등장하여 재미있었다. 

 신정에는 상정이 형의 졸업 논문을 읽었다. 글이 난해해선지, 내가 무식해선지 잘 읽히지가 않아 한참 들여보았다.

 노량진 수산시장이 없어지기 전에 회를 먹으면서 술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자료집으로 제본을 4권이나 했고, 심리학 관련 서적을 몇 권 구입했다.

 덴마크 재즈 레이블 스토리빌의 "인 코펜하겐" 시리즈 음반 두 장을 샀고, 

 파고다스타 인터넷 강의를 둘러보다가 일단 예전에 사놓은 교재를 공부해야 돈이 아깝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파묻히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1월, 

 파묻힐 게 너무 많다는 게 아직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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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