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마지막 날에는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너와 나> 2기. 원숙한 프로듀서의 손길을 거쳐 아주 번듯한 팝으로 완성된 인디 음악 같은 느낌.
말은 이렇게 해도,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나는 아주 즐거웠는데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순간에 대해 줄곧 얘기하기 때문이었다.
가령 친구 집에서 친구들이 모두 모여 잠을 자게 됐다.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가느라 새벽 늦게까지 잠을 못 잤다.
배가 고파지고, 친구들과 외투를 입고 편의점을 갔다. 밤거리를 걸으며 새로운 얘기를 한다,
는 식이다. 그야말로 일상이란 뻘밭에 파묻힌 원석처럼 빛나는 감정들에 대해.
<너와 나>의 전략은 '담백함'을 무기 삼아 철저히 감정을 절제하며 청춘,
그 중에서도 가장 청춘에 집중할 수 있는 아주 짧은 시기, 고교 2년생의 '풋풋함'을 노래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문득 나는 <너와 나>에서 어느 순간 '아름다운 순간'만 나열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혹은 쓰라린 실패와 좌절의 풍경마저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것은 우습게도 삶의 아름다운 모습만 보려는 (상업화된) 예술의 일관성,
팝의 이데올로기랄까, 팝을 소비하면서 우리가 값싸게 구하는 구원,
우리를 잠깐 어르고 달래다가 다시 냉혹한 현실로 내던지는 아주 잠깐의 구원을 닮았다.
우리는 물론 '아름다움'을 갈망한다. 예술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름다움이다.
(추에 대한 관심도 어찌 보면 자신의 미 의식을 다른 방식으로 충족하려는 또 다른 전략 아닐까)
팝은 상업적으로 통계와 사례가 나온 '대중 공통의 미 의식'의 지표랄까,
'절대 진리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동의한 것'에 대한 카테고리이고, 장르이고, 방법론이다.
하지만 삶의 미와 팝의 미는 다소 차이가 있다. 말장난으로 얘기하자면,
삶에서의 미는 사는(living) 것이고, 팝에서의 미는 사는(buy) 것이다.
고통 뒤에 오는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이 훨씬 가치 있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아름다움과 고통, 좌절과 실패는 상보적으로 붙어 있어야만 하는 가치인가?
아름다움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름다움을 억압에 대한 해소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라고 가정한다면
아름다움은 결국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추함, 악함, 비윤리적인 무언가의 존재로 말미암아 완성된다는 소리가 된다.
이를테면 우리 삶처럼. (만약 우리 삶에 아름다운 순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고통과 억압에 대한 경험 사이로
삐져 들어오는 일시적 해소, 혹은 해소의 과정에서 오는 학습 카타르시스 때문이 아닐까?
가혹한 노동에 매몰되어 있다가 휴가에서 마주한 풍광에 감동한다거나 자신이 갈망하는 가치관이 실현되거나
공동선을 향해 모두가 연대하여 해결해가면서 느낀 유대감의 경험이라거나)
그러나 팝은 그러한 전천후의 과정은 과감히 생략하거나 장르적 특징, 문법 등으로 퉁쳐 설명하지 않는다.
그 결과 아름다움만 떡, 하니 놓여 있는 괴상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가령 <너와 나>에서, 혹은 여타 애니메이션은 '쥬이상스'적인 순간만 그려내고 있지
지리멸렬하고 무감동하며 기계적인 일상을 그려내지 않는다. 일단 분량상의 제약도 있지만 말 그대로
대부분의 일상은 팝으로서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연애, 혹은 준연애 즈음의 두근거리는 남녀나
친구들의 웃음이지 매일매일 똑같은 접시를 똑같은 시간을 들여 하는 설거지라거나 단어 암기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으, 얘기가 길어졌는데 요즘 나의 근황은 행복하다는 거다. 진짜.
얼마 전, 밤에 세탁이 끝난 빨래를 방에서 널고 있는데 노란 수면등 불빛 속에서 자고 있는 생활관 아이들이,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오는 라디에타와 잘 작동되는 세탁기와 자리가 널널한 건조대가,
안전하게 빨래를 너는 나는 행복했다.
이제 나는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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