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10월 13일

2014. 12. 14. 18:41 from blur girl's diary
쿡 티비의 무료 영화 리스트를 살펴보는 건 즐겁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유무료를 분간하는 걸까.
지하철 노점상 문고판 DVD(3000원)에 나올 법한 영화를
무료로 내던지는 걸까?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선택할 법한
영화는 냉큼 유료화시키고?
하지만 우스운 건, 대부분의 무료 영화들은
영화과 학생들이 대학 수업에서 필히 봐야 할 작품들이라는...
것이고, 대학을 굉장히 불성실하게 다녔던 나로선
대학교 5학년 1학기를 시작한 기분이다.
내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처음 보았던 안제이 바이다의 <다이아몬드와 재>라거나
새벽 근무를 서면서 오손 웰즈의 <악의 손길>을 보던 것,
매주 아침마다 드라마 보듯 쪼개어 빌리 와일더와
오드리 햅번의 <하오의 연정>을 보던 것,
스파이크 리의 <섬머 오브 쌤>과 우디 알렌의
<맨하탄 살인 사건>, 아벨 페라라의 <킹 오브 뉴욕>을
나란히 보며 뉴욕이란 도시를 다각도로 점검하던 것
등은 참 유니크한 군 생활을 나는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쿡 티비에는 이상하게 한 작가의 많은 작품이
통째로 무료일 때가 있는데, 이타미 주조란 나로선
듣도 보도 못한 일본 감독의 경우가 그렇다.
정말 쿡 티비의 일본 영화 가운데 무료인 것은
이 사람 영화 밖에 없다. (극히 소수의 무료 영화가 있지만)
그런 맥락으로 또 반가운 사람은 짐 자무쉬.
그의 모든 영화가 무료는 아니지만 <데드맨>, <지상의 밤>,
<미스테리 트레인> 등이 무료인 것을 확인했다.
더 찾아보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당직 근무를 마치고 전략적으로 생각하여
아침 일찍 잠을 잔 후 점심 늦게 일어나
짐 자무쉬의 <지상의 밤>을 보았다.
각 도시의 야밤을 운행하는 택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직조하는 방식은 매우 익숙하다.
뭐랄까, 기타노 다케시가 <3x4-10월>을 찍기 전에
<그 남자 흉폭하다>로 테스트를 했고, <소나티네>로
완성을 한 느낌으로 <지상의 밤>은 <커피와 담배>를
위한 비디오 체크 같다는 인상이 들었다.
LA,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을 관통하며 초저녁부터
새벽 아침까지 달리는 택시(와 승객들)를 보며
각 도시의 상징성과 민족, 문화, 고유의 결을 파악하려는
(관객의 비평적) 시도는 조금 짜치는 것 같다.
나는 그냥 텅 비어 있거나 기계적으로 불을 밝히고 있을
뿐인 도시를 크루즈 여행하듯 저공 비행하는 택시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이상하게, 나는 짐 자무쉬의 영화에 정말 큰 감흥을
느낀다거나 그의 감성에 공명하여 좋아하는 감독이라고
선뜻 말하질 못하겠다. 이건 더 생각을 정리하고
단어를 선택해야 할 문제겠지만 그의 영화는 내게
과거 걸작이라 부를 만한 영화들에 대한 짐 자무쉬
개인적인 되풀이라고 느껴진다. 가령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냄새를 물려받은 뒤 세련되게 배반한 스트록스처럼.
뭔가 그만의 이야기나 그만의 영화라고 받아들여지기보다
니콜라스 레이나 빔 벤더스의 영향권 안에서
영화 유희를 하고 있는 느낌.
그렇다고 내가 그의 영화 전체를 하대하는 것은 아니다.
<영원한 휴가>와 <천국보다 낯선>은 영화사에 기록할 만한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이 두 영화는
그의 학생 시절 만들어진 영화들이고 짐 자무쉬적인
영화 방법론이 완성되기 이전의 작품들이라는 것.

한편 <지상의 밤>을 보면서 든 생각.
나는 가끔 영화에서 이야기보다 침묵과 풍경이 더 좋고,
음악에서 보컬이나 멜로디보다 소음과 연주가 더 좋을 때가 있다.
<지상의 밤>에서도 택시 안에서 벌어지는 짐 자무쉬적인
인물들의 짐 자무쉬적인 소동보다 나는 택시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 밤 그 자체가 더 좋았다.
비벌리힐스의 풍요롭게 침잠한 주택가 밤 풍경,
멋지게 지글거리는 브루클린 다리의 불빛과 상점들,
싸구려 와인병이 자꾸 발에 채이는 파리 외곽과
고요한 불륜으로 잠들어 있는 로마,
눈에 폭 뒤덮인 헬싱키, 그리고 아침.
그렇다고 영화에서 이야기가 삭제된 채 풍경만 나열된다면
그때도 풍경이 좋게 느껴질까?
그러니까 나는 잠깐 삽입된 "풍경"의 탁월함을 위해
지루한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네 삶을 위로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내일의 즐거움을 위해 지겨운 오늘이 있다'
하지만 순수한 아름다움을 위해, 그러니까
단팥빵의 맛있는 부분만을 위한 예술이 가능할까?

산책하고 싶다!

'blur girl's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년 10월 15일  (0) 2014.12.14
14년 10월 14일  (1) 2014.12.14
14년 10월 10일 네번째  (0) 2014.12.14
14년 10월 10일 세번째  (0) 2014.12.14
14년 10월 10일 두번째  (0) 2014.12.14
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