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12월 1일

2014. 12. 14. 18:48 from blur girl's diary
스위치를 켜듯, 12월의 첫 날부터 눈이 펑펑 내렸고
나는 아이들이 씩씩거리든 말든 모른 척하며 침대에 누워
영화 채널을 돌렸다.

SF 영화가 보고 싶었다. 데이빗 크로넨버그 식의 끔찍한
디스포피아 영화도 좋았고, 스탠리 큐브릭이나 프리츠 랑의
고전적이고 현학적인 영화도 좋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B무비를 보기로 했는데,
쿠엔틴 타란티노나 미이케 다케시처럼 자의식을 갖고
능청스레 완숙하게 기교를 뽐내는 장르적 의미의 B무비가
아니라 진짜 '난 열심히 찍었는데 이게 왜 B무비죠?' 하고
반문할 법한, 진정한 의미의 B무비틱한 걸 보았다.

그것은 이름도 가공할 만하다. <블랙 머니 게임>
구글링을 해보니 원제는 <Persons Unknown>이라는데,
아마 마약 판매를 통해 생긴 돈을 둘러싼 이야기여선지
국내 배급사가 마음대로 "더러운 돈(이 얽힌) 게임"으로
제목을 의역한 듯하다. 어쨌든.

영화는 만족스러운 B무비 특유의 엉성하고 서투른
작법으로 절반을 구성했으며, 나머지 극소수의 감독 특유의
정서로 이루어졌으며, 끝끝내 '이건 역시 걸작이다. 작품이다'
따위의 감상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니 그것 역시 B무비다웠다.

허나 영화는 여러 의미로 훌륭했으니 90년대 장르 영화와
B무비의 참의미를 탐구하는 시네필은 관람을 권한다.
(심혈을 기울여 찍은 통속 멜로 영화 <애니언텀 블루> 식의
주류 영화보다 훨씬 낫다. 나는 저번 당직 근무 이후의
영화로 그것을 골랐는데, 입대 후 가장 후회하는 선택 톱5에
선정될 만한 안 좋은 결정이었다)

인간의 욕망과 욕심으로 그릇된 행동/결정이 파국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떠올리게 하고,
(또 마약/범죄 조직에 연루된 제3자와 추격자의 대결 구도
역시 그러하다), 장애/결핍/상실을 겪은 연인의 로맨스라는
점에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연상케 한다.

여기서 나오미 와츠(그녀의 눈부신 젊음은 가히 열광적!)는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여성으로 나오는데,
알콜 중독 주인공은 과거에 음주운전으로 장애인을 치어
죽인 전력이 있다. 이 둘의 멜로를 가로막는 것은
1. 장애인과 정상인이란 편견과 실제적 차이
2. 연인/아내에게 요구되는 남성의 기대에 대한
여성 자신의 좌절과 자괴감 (혹은 사회적 요구에 대한 두려움)
3. 과거의 망령으로 인해 겪는 현실 직시의 어려움
등이 있다. 언젠가 신형철이 쓴 결여에 대한 비평을 참고 하는
것도 좋으리라. 나는 보부아르의 책에서 어제 읽은 문구가
떠올랐다. 결혼은 근본적으로 에로틱한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양립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함과 모순을 갖고 있다고.
주인공이 나오미 와츠를 사랑하는 에로틱한 가치와
장애인을 사고로 죽인 죄책감에서 오는 죄의식에서 비롯된
사회적 가치는 과연 단순히 나오미 와츠가 걱정하는 것처럼
섹스가 어렵다는 것을 차치하고 두 사람의 미래 속에서
얼마나 융화되고,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자리할 수 있을까.

보부아르 책을 읽을수록 결혼은 우스운 코미디 같다.
하지만 보부아르에겐 사르트르가 있었고, (그녀를 비단
사르트르의 연인, 혹은 계약결혼으로 연상하는 것은
지극히 협소하고 종(種)적인 접근이다)
그녀가 직접 말했다시피 모두가 그녀를 비난해도
사르트르를 만나고 사랑했으니 그녀에겐 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몹시 질투가 났고, 그러한 경험과 관계의
결여는 나를 항상 한숨 짓게 한다.

'blur girl's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14년 12월 5일  (0) 2014.12.14
14년 12월 1일 두번째  (0) 2014.12.14
14년 11월 28일  (0) 2014.12.14
14년 11월 20일  (0) 2014.12.14
14년 10월 29일 두번째  (0) 2014.12.14
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