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대 전, 밴드를 하면서, 그들과 사랑을 하고
그것 때문에 그들을 증오하면서 완전히 정신적인 창녀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에 관여하고
몸짓과 목소리에 동화되어 조울의 폭풍우 속에 놓여 있었다.
유대감이 훈훈할 땐 세상은 그리도 아름다웠으나
관계가 느슨할 때, 혹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내가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느낄 때 세상은 내게
가차없이 가혹했다.
이는 알다시피 사춘기적, 유아적 천착이다.
관계에 있어 자주성을 잃어버린 수동적인 마조히즘의 전형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벗어나질 못했다.
그것은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 겨우 실마리가 풀렸다.
국가가 몸소 나서 나를 그들로부터 떼어내주었다.
(대한민국이여, 영원할진저!)
물리적 거리감은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그 축제와 같은 소란과 떼어지지 않는 끈적인 열광은
더 이상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나는 피곤했고, 지쳤다.
늙은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과거와 청춘과 그 사람들을
잃어버렸음을, 내 20대가 끝났음을, 비로소 나이를 먹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8월마다 누군가를 잃었고, 거기에 번민했는데
올해 역시 마찬가지여서 나는 이번 여름 대대적인
이별을 겪었다. 그것은 매우 폭력적이었고, 방식에 있어
한심할 만큼 일방적인 처사였다.
대신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나는 이 완벽한 무(無)에
몸이 떨릴 정도로 개운했다. 이제야 나는 혼자가 되었다!
무엇이든 다시 할 수 있고, 가능하다!
모든 걸 잃어버렸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나의 순진무구한 기대는
결국 과거의 경험들을 반추하며 다시 되풀이하고 싶은
(다만 사람과 장소만 바꾼 채) 천진난만성임을
요즘의 나는 안다. 나의 20대 시절 과거 A는
더 이상 반복하면 안 될 나의 반성 노트다.
이 노트에 적힌 결함 대부분은 나에게 있다.
결국 내가 바뀌지 않으면 과거 A는 어퍼스트로피만 붙인 채
무한증식되어 같은 본질, 다른 외피의 실망만 낳을 뿐이다.
나는 바뀌고 싶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더 성숙했다면 그때 결혼식 때 미친놈처럼 숨어
있다가 말없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홍상수처럼
"예쁘게 잘 살아"라고 문자하지 않았을 것이며,
"푸른 수평선 너머"를 녹음하여 보내는 것을 끝으로
우리는 파산했다고 선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은 상당히 구차하고 한심한 일인데,
결국은 당사자들에게 "나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엉망인 나를 굽어살펴 동정할 것을,
한번 더 기회를 줄 것을 앙망합니다"고 비렁질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문제의 근원의 한 축)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야 나는 성장할 수 있다고 또 다른
목소리가 계속 나를 설득시키는 것이다.
고로 나는 두 악마에 의해 계속 갈팡질팡하면서
결국 악마처럼 최악의 한 수 한 수를 두며 패착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엎드려, 울며 용서를 빌고 싶기도 하고
영영 잃어버림으로써 나를 한층 더 고독하게 하고
새로운 나를 만나보고 싶기도 하다.
그 상이한 두 가능성의 미래 속에서 나는 분열되고 있으며
그것은 모두를 비참하게 하고 있다.
차라리, 지난번 통화에서 그가 내게 욕을 한 마디
해주었다면 더 후련했을 텐데.
우리 모두에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극언뿐이고,
do or not,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참 쉽죠?
그것 때문에 그들을 증오하면서 완전히 정신적인 창녀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의 표정 하나하나에 관여하고
몸짓과 목소리에 동화되어 조울의 폭풍우 속에 놓여 있었다.
유대감이 훈훈할 땐 세상은 그리도 아름다웠으나
관계가 느슨할 때, 혹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내가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느낄 때 세상은 내게
가차없이 가혹했다.
이는 알다시피 사춘기적, 유아적 천착이다.
관계에 있어 자주성을 잃어버린 수동적인 마조히즘의 전형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벗어나질 못했다.
그것은 매우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 겨우 실마리가 풀렸다.
국가가 몸소 나서 나를 그들로부터 떼어내주었다.
(대한민국이여, 영원할진저!)
물리적 거리감은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그 축제와 같은 소란과 떼어지지 않는 끈적인 열광은
더 이상 즐거워보이지 않았다. 나는 피곤했고, 지쳤다.
늙은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과거와 청춘과 그 사람들을
잃어버렸음을, 내 20대가 끝났음을, 비로소 나이를 먹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8월마다 누군가를 잃었고, 거기에 번민했는데
올해 역시 마찬가지여서 나는 이번 여름 대대적인
이별을 겪었다. 그것은 매우 폭력적이었고, 방식에 있어
한심할 만큼 일방적인 처사였다.
대신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나는 이 완벽한 무(無)에
몸이 떨릴 정도로 개운했다. 이제야 나는 혼자가 되었다!
무엇이든 다시 할 수 있고, 가능하다!
모든 걸 잃어버렸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나의 순진무구한 기대는
결국 과거의 경험들을 반추하며 다시 되풀이하고 싶은
(다만 사람과 장소만 바꾼 채) 천진난만성임을
요즘의 나는 안다. 나의 20대 시절 과거 A는
더 이상 반복하면 안 될 나의 반성 노트다.
이 노트에 적힌 결함 대부분은 나에게 있다.
결국 내가 바뀌지 않으면 과거 A는 어퍼스트로피만 붙인 채
무한증식되어 같은 본질, 다른 외피의 실망만 낳을 뿐이다.
나는 바뀌고 싶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더 성숙했다면 그때 결혼식 때 미친놈처럼 숨어
있다가 말없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며, 홍상수처럼
"예쁘게 잘 살아"라고 문자하지 않았을 것이며,
"푸른 수평선 너머"를 녹음하여 보내는 것을 끝으로
우리는 파산했다고 선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것은 상당히 구차하고 한심한 일인데,
결국은 당사자들에게 "나는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고,
여러분들이 이렇게 엉망인 나를 굽어살펴 동정할 것을,
한번 더 기회를 줄 것을 앙망합니다"고 비렁질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자존심(문제의 근원의 한 축)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초월해야 나는 성장할 수 있다고 또 다른
목소리가 계속 나를 설득시키는 것이다.
고로 나는 두 악마에 의해 계속 갈팡질팡하면서
결국 악마처럼 최악의 한 수 한 수를 두며 패착하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엎드려, 울며 용서를 빌고 싶기도 하고
영영 잃어버림으로써 나를 한층 더 고독하게 하고
새로운 나를 만나보고 싶기도 하다.
그 상이한 두 가능성의 미래 속에서 나는 분열되고 있으며
그것은 모두를 비참하게 하고 있다.
차라리, 지난번 통화에서 그가 내게 욕을 한 마디
해주었다면 더 후련했을 텐데.
우리 모두에게.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극언뿐이고,
do or not,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참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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