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어디에서 시동이 걸렸더라.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번역하고 있는데, '나'와 '쥐'가 '뭔가에 홀린 듯' 맥주를 여름 내내 마셔대고 땅콩 껍질을 바닥에 5센티 가량 쌓이도록 내던지던 "제이스 바" 풍경은 다시 봐도 환상적이다. (원문으로 읽고 있으니 그 소회는 남다르다. 확실히, 좋아하는 해외 작품을 원문으로, 언어를 차곡차곡 배우는 심정으로 더듬는 작업이란 매력적이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려는 군인 정신이 좀 많이 필요하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얼마 전 홍대 툰크(난 계속 "통크"로 기억하고 있다)에서 산 츠지야마 시게루의 <방랑의 미식가>였다. (만화에 대해 잠깐 소개하면, 먹방 시대인 오늘날 모르면 간첩이라 할 만한 요리 만화의 고전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 구스미 마사유키가 이번엔 다니구치 지로 아닌 츠지야마 시게루와 작업을 한, 속편 격의 작품이다. <고독한 미식가>는 분명 훌륭한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 다니구치 지로 스타일의 '건실한' 그림체와 배알 뒤틀리게 하는 일본의 소시민적 행복을 구태여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만화를 사게 된 이유는 오로지 츠지야마 스게루 때문이다. 그는 푸드 포르노로 전락하기 십상인 요리 장르를 하드보일드 블랙코미디로 뒤섞는 대단한 작가이다. 물론 이 방면의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우에야마 토치지만!)

<방랑의 미식가>에서 가장 인상적인 에피스드는, 주인공이 지방 소도시에 출장을 왔다가 들린 작은 술집에 대한 이야기인데 요리와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여주인과 추파를 던지면서도 항상 출석하는 단골 손님(술에 취해 졸다가도 별안간 바닥에 엎드려 팔굽혀 펴기를 하는데, <강원도의 힘>에서 모텔 난간에 매달리며 자신의 멀쩡한 정신을 호소하던 남자가 떠올랐다), 단둘이 지키는 조그마한 가게다. 굴은 먹지 못하는 주인공은 미안한 마음에 연거푸 맛있다며 안주를 시키고, 투닥투닥이는 주인과 단골을 지켜보며 천천히 술에 취한다. 그리고 와하하, 크게 웃고는 사라진다. (영원히)

 

맞다. 이 만화였다. 동네에 자주, 편하게 들려서 혼자 술을 마실 수 있는 술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있는 동네는 나치 독일군에 맞서는 스위스 첩첩산중 마을처럼 산악 지형인데다가 구멍가게를 가고 싶어도 차로 10분, 자전거로 15분, 걸어서는 왕복 1시간 남짓이 걸리는 상상초월의 지역. 물론 차를 타고 15분 거리의 시내로 나가면 아파트 단지와 대형 텔레비전으로 야구 경기를 함께 보며 호프를 기울일 수 있는 광장형 술집과 세련된 이자까야 등등도 많지만 말했잖나, 내가 원하는 곳은 슬리퍼를 신고 훌훌 찾아가 고민을 내려놓고 군대 식의 생각 없는 대화를 일삼다 비척비척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동네 술집. 그런 곳을 위해 자동차 시동을 건다는 발상부터가 오류다. 잘못이다. 역시 시내가 아닌 (첩첩산중인) 우리 동네에서 찾아야 한다.

 

몇몇 후보군이 있다. 가령 최근 중학교 앞에 새로 생긴 일본 음식점. 지나가면서 흘끗 본 이곳은 처음부터 기상천외했다. 열한 시쯤, 가족과 한번 찾아간 적이 있는데 "클로즈" 팻말을 걸어놓은 가게 안쪽에선 군가처럼 다함께 부르는 노랫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동네의 노인들이 궐기한 것 같았다. 최초의 압도된 기억을 무마하여, 친구와 함께 2차 탐방. 내부는 평범한 식당이었다. 대학가에 있을 법한 푸드 코트 풍의 일식집. 메뉴도 돈부리나 우동 등등의 식사류와 오뎅탕, 오코노미야키 안주류 투 트랙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오뎅탕과 오코노미야키, 그리고 술 먼저 주세요, 호쾌하게 주문했다. 동네의 대안 학교 학생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계속 눈치를 보면서 우동을 먹었다. 몰래 술을 먹다 걸린 사람처럼. 안주가 나오기 전에 소주 2병을 비우는 술꾼이 하마터면 그들의 지도관이 될 뻔한 건 꿈에도 모를 것이다. 오뎅탕은 먹을 만했지만 다소 비쌌고, 오코노미야끼는 반죽부터 익힘까지 영 꽝이어서 몇 점 먹질 못했다. 이곳은 어쩌면 혼자 술을 마실 만한 곳이다. 안주가 좀 싸면 말이다. (츠지야마 시게루 선생의 만화에 나오는 술집은 그렇게 푸지게 안주를 먹고도 놀랄 정도로 싼 가격이었다) 그렇다고 식사와 술을 함께 하는 반주는 내 스타일이 아니어서 일단 이곳은 보류.

 

그럼 성당 아래의 순댓국집? 오, 난 순대국이 싫다. 너무 배부르다. 밥을 말고, 국물까지 다 비우면 8킬로 정도 찐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포만감이 너무 불쾌하다. 밥 없이 건더기를 건져먹으면서 소주를 마실 수 있다. 친구와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큰 위안이 되는 방법이지만 혼자 식당에서 그러고 있노라면 그렇게 추레할 수가 없다. 이곳의 순대국은 맛있는 편이다. (아마 동네에서 가장 신뢰 받는 식당일 것이다) 하지만 백색의 형광등은 내게 마이너스 포인트다. 난 형광등 불빛을 정말 싫어한다. 무엇보다 술집처럼 마음이 은거하고 심신을 놓아야 할 곳이 취조실처럼 번쩍번쩍 흰빛을 내리쬐고 있노라면, 그 안에 견디는 걸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입맛이 달아난다. 게다가 이곳은 오픈된 공간이다. 다른 손님으로부터 나를 숨길 아무런 가림막이 없다. 지금 이 녀석은 혼자 술 마시는 게 버릇 들린 술꾼입니다요! 하고 광고하는 꼴이다. 이곳도 보류.

 

에휴, 그럼 집에서 혼자 드세요, 라고 할 수밖에 없겠네.

그것도 좋지. 어서 연구실을 꾸미고 싶다. 어두운 거실엔 1인용 소파와 흔들의자가 있고, 노란 갓등과 티 테이블이, 그리고 전축과 파이프 담배가 있어야 할 것이다. 부엌 선반엔 반쯤 남은 위스키 병이 있고, 모든 일이 끝난 저녁에는 나는 거실에서 혼자 앉아 있다. 가끔 친구가 오면 소파에 마주보고 앉아 옛날 재즈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정도 낭만을 꿈꿀 권리는 제게 있겠죠?

 

동네 술집 찾는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다. 남양주에서의 접촉에 대해 몇 가지 보고하고자 한다.

남양주 시민들은 가정의 컴퓨터에 이상이 있다면 평내의 주연테크를 찾아가세요. 네, 도미노 피자 옆에 있는 그곳. 어머니의 LG 올인원 컴퓨터 속도가 너무 느려 찾아갔는데 SDD 하드디스크를 업그레이드하여 제 속도를 찾았다. 그 후련함이란. 직원 분도 친절하다. 그거면 되지 않은가.

또 마석에서 커피 볶는 삼촌. <홍카페>라고도 하고 <커피 볶는 삼촌>이라고도 하는데, 내가 아는 시내 유일의 커피콩 취급점이다. 군 복무 당시 처음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접한 '코나'도 있고, 종류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다. 나는 이번에 '코케허니'를 샀는데, 요플레처럼 새콤달콤한 향이 환상적이다. 꽁지 머리를 묶은 삼촌이, 한석규처럼 부드럽게 웃으면서 커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준다. 남양주는 커피 문화도 마땅찮은 곳이라고 혀를 차는 분들은 지금 당장 <커피 볶는 삼촌>을 찾아가시오. 그분이 당신을 구원하리니. 아무튼 이곳은 나의 보물 같은 곳이다!

 

어제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한겨레 신문사와 수동 지국에 전화를 걸어 담판을 지었다. 이제 곧 나도 "종이신문 독자"가 된다. 아, 이 감격이여. 하지만 아침마다 집앞에 신문이 놓인 풍경은 아직 요원하다. 신문 오토바이가 '첩첩산중'인 우리 집까진 도저히 올 수 없다는 것이다. 타협점으로 내가 늘 운동을 가는 주민센터와 오늘 쇼부를 보았다. 나와 영 사이가 좋지 않은(이라기보다 대화다운 대화 나눠본 적이 없는) 관리 아저씨는 안내실에서 손자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선생님'이라 불렀고, 신문을 맡아달라며 부탁했다. 그는 스스럼없이 그러마고 했고(오, 이제 항상 먼저 인사하고 박카스도 드리리라) 나의 한겨레 독자 라이프도 곧 시작된다! 하지만 저녁마다 투잡을 뛰는 우리 민노당 출신의 신문 배달원 아저씨가 연락이 없다. 내일 전화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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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