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가 한겨레 독자로서 신문을 다시 읽게 되었다는 소식부터 전해야겠다. 이 감격적이고도 거대한 낙관으로의 한 걸음 도약을 다시없이 기쁘게 전하고 싶지만, 사실 재회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가 상상하는, 아침에 하품을 하며 일어나 현관문을 열면 그 앞에 신문이 탁 놓여 있고, 그것을 집어 툭툭 털며 집으로 들어와 커피와 함께 헤드라인을 살피는 그런 구독이 아니기 때문에. 첩첩산중 산악 지형 덕분에 신문 배달원이 집까지 못 온다는 사실은 전에도 밝힌 바, 타협책으로 내가 노상 가는 주민센터에서 찾아가기로 했는데 신문을 맡아준다는 안내 아저씨가 문을 걸어잠근 채 퇴근한 것이 아닌가. 월요일을 상쾌하게 한겨레와 함께 시작하고 싶었던 나는 잠긴 안내실을 부수고서라도 신문을 읽어야겠다는 투지 아래 모든 직원들을 호출하는 등의 수선을 피웠다. 더군다나 점심 식사까지 끼는 바람에 나는 30분 넘게 주민센터 복도에서 기다려야 했다. 아저씨에게 "기름칠"로 드릴 홍삼 음료수가 정말 나를 멍청하게 만들었다. 눈이 많이 내린 어제였다. 한 시 넘게 어정어정 걸어오는 직원을 보고서, 미용실을 들렸다 불광동을 가려던 나의 계획은 강제로 수정되었다. 어찌 되었건 신문을 손에 넣는 데에는 성공. 정말 눈물겨운 구독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귀하게 신문 읽는 독자의 마음을, 부디 한겨레가 알고 고군분투를 포기하지 않았음 한다. 종이 신문을 매일매일 읽는 것의 혁명성에 대해선 언젠가 진중히 논할 계획이다. 오늘날의 투쟁 방법론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면서 뭔가를 바꾸려는 생각부터가 틀려먹은 것이다.

 

지순협의 학생이 되었다. 내년부터 불광동으로 수업을 나간다. 양정에서 전철을 타면 불광역까지 칼 같이 1시간 10분이 소요된다. 그러니까, 스탠 게츠의 1시간 18분짜리 히트 앨범을 들으면 8분 남기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런데 아주 나를 흥분하게 하는 것은, 편도행 소요 시간과 신문을 읽는 시간이 일치한다는 것. 그것도 꼼꼼하게 모든 지면을 다 읽을 수 있다. 이건, 종이 신문을 꾸준히 읽는 독자라면 알겠지만 나름 기적 같은 일이다. 일단 종이 신문을 앉은 자리에서 독파하는 데에는 파편화된 포털 사이트 뉴스 토막을 읽는 것과 차원이 다른 공력과 시간이 들어간다. 관심 없는 기사를 패스해도 40분은 족히 걸린다. 생각해보라. 요즘 같이 바쁘고 가혹한 노동 처우 속에 사는 현대인들 가운데 이렇게 느긋하게 종이 신문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나도 구독을 하면서 걱정을 하긴 했다. 타이트하게 구성된 요즘의 내 생활 속 어디에 신문 읽는 시간을 넣어야 할 것인가, 하는. 그런데 딱 해결된 이 후련함. 학교를 가는 동안 신문을 읽고, 다시 돌아오는 길엔 원하는 책과 음악을 들으면 된다. 최고! 그런데 전철에서 신문 읽는 스킬은 좀 더 숙련되어야 할 것 같다. 특히 앉아서 신문을 펼쳐 읽는 것은 드럼통 속에 들어가 아크로바트를 하는 기분이랄까, 뼈가 욱씬거린다. 한 시트에 한정된 면적 외에 침범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는데, 나는 신문을 막 솜씨 좋게 접었다 폈다 하는 것도 서투르므로 난감하기 짝이 없다. 차라리 서서 보는 게 편하긴 한데 만원 전철이면 또 문제가 다르다. 주여, 지혜를 주소서.

 

한겨레 구독은 군 복무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여 사무실의 신문을 한겨레로 바꾸었고(마침 전역을 앞둔 장교는 별 상관하지 않았다), 사무실에 출근하여 커피를 내리고 책상에 펼친 신문을 읽는 상쾌함도 그때부터였다. 한겨레는 무척 성실하고 고민 많은 친구 같다. 확 튀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존재 자체로 귀감이 되며, 또 귀를 기울일수록 영혼이 살찌는 기분이다. 그런데 내가 군 시절 겪은 문제는, 당시 세월호 유가족의 편지를 1면에 싣던(박재동 선생님의 캐리커처와 함께) 기획 덕분에 나는 정말 매일 같이 아침을 훌쩍거리면서 시작해야했다. 어떻게 그들의 안녕을 듣고도 시큰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와는 별개로, 내가 군인이었단 사실도 별개로, 아침마다 우울하고 눈물이 핑 돌며 시작하는 것은 조금 곤란한 일이긴 했다. 그런데, 반 년만에 다시 재개한 한겨레를 읽으면서 나는 다시 울컥했다. 전철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것은 도쿄 특파원 길윤형 씨(군대 있을 때부터 이분의 기사는 꼭꼭 스크랩하곤 했다)가 쓴 일본 야권 연대에 관한 기사였는데, 공산당까지 합세하여 아베의 폭주를 저지하고자 하는 일본의 끈질기고 두터운 투쟁 의지는 절망적인 한국인 이준하를 감동하게 했다. 여전히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고, 막연하고도 두둑한 안도가 느껴져서일까.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서는 절망. 희망이 없다. 사회의 갑갑함을 아프게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신문 읽기란. 우는 한이 있어도 눈감지 않으리.

 

좀 다른 말인데, 나는 그리 탐욕적이진 않지만 내 것에 대한 분명함을 지키고자 하는 욕구는 다소 강하다. 그러니까, 뭔가를 더 가지려 하고, 많은 걸 원하는 건 아닌데 내가 애착을 갖는 사물과 영역에 대해 침범을 받는 것에 대해 강렬한 거부감을 느낀다. 군대에서도 그랬다. 많은 인원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 내 것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움에도, 나는 어떻게든 내 자리를 만들고자 했다. 창고로 쓰이는 공간에 책상과 의자를 숨겨놓고 나만의 공부방을 만들거나 쟈가비 상자를 보석함처럼 꾸며 부활절 때 받은 계란을 일 년 넘게 보관하거나. 나는 재산이 별로 없지만 내가 아끼는 물건은 몇 개 있다. 예전엔 기타 이펙터가 그랬고, 요즘엔 생일날 산 나이키 에어맥스 신발 정도?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은 것들. 책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가 이 말을 꺼낸 진짜 이유는, 돈 주고 산 물건 가운데서 정말 애정이 떨어지는 것이 유감스럽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무라 히로아키의 단편집 <이사>. 얼마 전 홍대 툰크에서 산 것인데, 몇 장 보다 얼마나 후회가 들던지 아직도 꺼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너무 낙관적이었다. 이사, 라는 제목만 믿고 과소비했다. 생각해보면 <무한의 주인>도 썩 좋아하는 만화가 아니었는데, 바보. 누구에게 그냥 주고 싶을 정도다. 갖고 있는 게 싫다. 싫어하는 물건을 선물로 줄 수도 없고, 난감하군. 사무라 히로아키 팬이 주변에 있었으면 처분할 텐데. 유감.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곳에서 도망쳐왔다. 내 자신을 내던져야 하는 길목에선 어김없이 돌아섰고, 세상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 만족하고 그걸로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결과 나는 여전히 집에 있고, 나를 찾는 곳 역시 집뿐이다. 늘 최고의 선택을 하고자 한다. 최고의 선택의 순간이 오면, 모두가 생각한다, 그때는 내던져야지. 내 삶을 증명하고자 한다. 다만 그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라며 몸을 사리고 어영부영의 결과 삶이 내 자신을 추수해간다. 삶이 나를 내 멋대로 요리한다. 그럼에도 나는 안심한다. 이렇게 내몰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고 있지만 내 모자람 탓은 아니야. 나는 언제라도 할 수 있어. 나는 재능이 있지. 다만 그걸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야. 행동하지 않았을 뿐이야. 오늘 주민센터 체육관에서 샤워를 하면서, 대체 무엇을 계속 두려워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비참한 케이스를 비교해가며, 내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해가며 조심조심 안전하게 살려고 하는가.

 

세상에 죄를 짓지 않는 윤리적인 노동을 하면서, 뜨겁게 공부하고, 평생 글을 쓰며 살고 싶다.

지혜와 용기와 체력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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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