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사라진, 외대 수정포차에서 영조 형과 술을 마시면서, 정확히는 그로부터 김수박의 <아날로그 맨>을 소개받은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나만의 <올해의 작품> 수상작. 그냥 한 해 동안 감상한 작품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남기고 나의 삶에 스며든 것을 한 작품 선정하는 것. 그렇게 시작된 2010년의 <올해의 작품>은 당연히 <아날로그 맨>. 어딘가 안착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모든 이들의 히어로상을 제공한 이 작품은 졸업할 때까지 라면 먹으면서 같이 보았다. 만화 속 주인공 헐랭이와 함께 산 느낌.

 

그 다음해인 2011년의 <올해의 작품>은 토요다 토시아키가 연출하고 마츠다 류헤이가 나온 영화 <우울한 청춘>. 이 영화를 접한 건 정말 우연이었는데 횡재한 기분이었다. 토요다 토시아키의 다른 영화도 찾아보고,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린 원작 단편도 읽어 보았는데, 다른 이유로 모두 좋았다. 하지만 마츠다 류헤이는 정말 최고다. 어젯밤엔 <행복한 사전>을 보았는데, 마츠다 류헤이가 꽤 괜찮은 일본 남자 배우를 넘어 세계적인 수준의 연기를 구사하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2년의 <올해의 작품>은 생각나질 않았다. 정서적으로 되게 부침이 많은 해였다… 하지만 난 연말마다 수상작을 꼭 꼽았으므로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추측컨대 마이클 윈터바텀의 <24 아워 파티피플>이나 우에야마 토치의 <아빠는 요리사>일 수도 있겠다. 둘 다 주구장창 보았으니까. 롤러코스터를 타고 천당까지 올라갔다가 레일이 사라져 그대로 곤두박질한 해였다.

 

2013년 가을부터 입대를 했으므로 제대한 2015년까지 <청색 시대>로 뭉뚱그리자면, 놀랍게도 이 기간에도 <올해의 작품>이 있다. 사실 <청색 시대>에 나는 다시 대학 생활을 (제대로) 시작한 것처럼 많은 영화와 책을 볼 수 있었다. 새벽 늦게 당직을 서다 혼자 오손 웰즈의 <악인의 손길>을 보고 난 이후의 쾌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긴 겨울을 함께 한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할아버지의 마법 같았다. 그러나 난 아주 개인적인 이유로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꼽을 수밖에 없겠다. 당직 교대를 하고 혼자 생활관 침대에서 이 영화를 보고 마지막엔 급기야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아프게 연애를 끝맺음한 사람 가운데 눈물 흘리지 아니할 사람 있을까. 다만 영화에 흠이 있다면 로버트 줄리아와 카메론 디아즈가 좋아하는 한 남자, 그 배우가 정말 멋대가리 없다는 거다. 매력이 없다. 왜 두 여자가 그렇게 매달리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아니니까…

 

아무튼 2015년 마지막 날, 어김없이 찾아온 <올해의 작품> 발표 시간. 최초로 공동 수상을 해야겠다. 바로 이소라와 영화 <카사블랑카>. 축하드립니다. 박수로 힘차게 주인공들을 맞이해줍시다.

 

이소라는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다. 군 생활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엉망진창인 나를 어떻게든 일으켜세운 단 한 사람이다. 특히 제대 이후, 방황하는 내 곁을 떠나주지 않았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나를 떠나가는 상황에서도 유일하게 끝까지 남아주었다. 나 역시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밤새 술을 마실 때에도, 광주의 단란주점에서 혼자 노래를 부를 때에도, 면허 시험을 볼 때도, 국도를 타고 강원도를 갈 때도, 광주-송정 KTX 기차에서도, 나의 꿈속까지 따라와 절망적인 날 어루만져 주었다. 그녀에게 감사한다. 내년에는 좀 더 내 자신이 어른스럽게 그녀를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칭얼거리기만 했으므로. 신의 손길이 앞으로도 그녀를 지켜주길 바란다. (쓰고 보니까 너무 끈적끈적한 짝사랑 티를 내 조금 무서울 정도다. 우려하지 마세요!)

 

다음은 <카사블랑카>. 사실 제대 이후에 어째선지 험프리 보가트 영화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는 내내 집에 혼자 있다 보니 조금 안 풀린다 싶으면 인터넷 티비에 한가득 있는 험프리 보가트 영화를 주파했다.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한 영화 몇 편 빼고는 죄다 봤을 것이다. 장 뽈 벨몽도의 우상이기도 한 그는 필름 느와르의 대명사처럼 한정된 역할로 인식되기 쉬운데 사실 다양한 군의 연기를 펼쳤다. 그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하워드 혹스의 <빅 슬립>에서 매력적인 마초 탐정, 빌리 와일더의 <사브리나>에서 고지식한 사업가, <키 라고>와 <아프리카의 여왕>에서 '첫 사랑이 배'라던 선원, <케인 호의 반란>에서 딱한 함장, <하이 시에라>에서 인정과 카리스마 둘 다 겸비한 악당, <필사의 도망자>에서의 야비하고 집요한 악당… 끝이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 내가 <카사블랑카>를 최고로 꼽는 이유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이유다. 그리고 그 이유는 비밀이다. 정 알고 싶다면 헤네시나 와일드 터키를 사들고 나를 찾아오라.

 

사실 <카사블랑카>는 애국주의 감성을 팍팍 자극하는 판타지 영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치명적인 매력을 겸비하고 있다. 일단 험프리 보가트가 분한 "릭"은 가히 최고의 로맨티스트 아닐까. 그토록 시니컬하고 합리적이며 이익셈법에 충실한 미국인이지만 결국 사랑이란 허울과 망상에 모든 걸 희생하는, 남자들이 상상하는 최고의 판타지! 여기에 히로인인 잉그리드 버그만. 너무 예쁘다. 정말 너무, 너무 예쁘다. 날 아는 사람이라면 알 터인데, 내가 특히 어떤 여배우나 여가수의 '외모'를 품평하거나 논하는 것 자체를 본 적이 드물 것이다. 하지만 잉그리드 버그만은 완벽하다. 심지어 오드리 헵번에 비교해도 그렇다. 뭐, 주관적인 이유겠지만서도 오드리 헵번이 화려하고 인위적인 매력으로 무장한 배우라면 잉그리드 버그만은 시대적인 수수함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순도의 완벽성, 완결성을 자랑한다. 아무 것도 꾸미지 않았는데 그걸로 된 것이다. 아무튼 <카사블랑카>의 뿌연 밤안개 속에서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헤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이제는 재현할 수도, 찍을 수도 없는 영화적 장면.

 

이렇게 올해도, <올해의 작품>도 지나갔다. 비록 수상하진 못했지만 2015년, 나와 함께 해준 은인들을 소개하면 토우메 케이와 카와치 하루카를 빼먹으면 안 될 것이다. 토우메 케이의 <메모리즈>는 요즘 유행처럼 번진 인문학 열풍에 힘입어 다시금 열독하기를 강권하는 작품. 특히 바슐라르의 이론이나 장소성, 벤야민의 아우라 등등의 개념들과 함께 읽으면 참 좋은, 토우메 케이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건축 전공자들은 필독할 것.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역시 너무 소중한 연재작.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학산에서 10권 이후부터 발매를 안 하고 있는데 마음 같아선 이후 원작들을 내가 번역하여 읽고 싶은 마음이다. 일본 가게 되면 사야겠다. 아무튼 만화를 막 보는 나조차 이 작품은 행여 질릴까봐 아주 아끼면서 보고 있다. <모모네>는 정말 맑고 기분 좋은 작품이고, <모르모트의 시간> 역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수작.

 

토우메 케이와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감수성을 지닌 카와치 하루카의 만화 역시 훌륭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짝사랑 진공팩> 단편집을 여러분께 권하고 싶다. 카와치 하루카의 진면목이 압축되어 있다. 그녀의 만화는 역시나 혼잣말 대사 표현이 훌륭하다. 정제된 혼잣말과 컷 구성은 그 순간을 작품화시킨달까, 바다 풍경처럼 수수하게 압도되는 그런 게 있다. 최근 보기 시작한 <여름눈 랑데뷰>도 무척 인상적이다. 설정도 재미있고, 전개도 작가가 공들여 소중하게 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리송한 꽃>에서 정말 아리송해진 독자라면 <여름눈 랑데뷰>로 안심해도 좋겠다. 물론 후시기나 하나 역시 카와치 하루카적인 센스로 뒤범벅이 된 "성인물"이고 나름 인상적이지만 어떤 깊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여름눈 랑데뷰>, 일본어로 풀면 눈(目)은 "메"로 발음하므로 "나츠메"인 줄 알았다. 다 알겠지만 나츠메하면 나츠메 소세키 아닌가? 근대 소설가 랑데뷰? 그런데 저 눈이 이 눈(雪)이었다. 고로 나츠메가 아니라 "나츠유키". 별 것 아닌데, 토우메 케이 역시 "토우(冬)+메(目)" 한자를 쓴다. 나츠메(여름눈)의 반대인 토우메(겨울눈)인 셈. 필명으로 알고 있는데 나츠메 소세키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冬"은 "후유"로 읽는데 왜 음독을 썼을까.

 

아, 그리고 아주 우연한 계기로 멀리 상암동까지 찾아가 본 라브 디아즈의 8시간짜리 영화 <멜랑콜리아>도! 이 작품은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두고두고 기억에 남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비록 중간중간에 많이 졸았지만 그럼에도 걸작이었다. 특히 뒷부분 필리핀 정글 씨퀀스와 마지막 엔딩은 최고다. 영화학도들, 특히 대안적인 영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은 필히 봄 직하다.  영화는 역시 길어야 한다는 내 지론을 확인한 것 같아 혼자 뿌듯.

 

이 외에도 거론치 못한 작품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넙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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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