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you rescue me

2014. 12. 17. 19:33 from blur girl's diary

 

 

 다시 본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은 압도적이었다.

 (자의적 구성체로서의) 기억과 나르시시즘, 상호관계 근간 위의 타자와 나라는 영원한 난제를

 이리도 아름답고 슬프고 적나라하고 치명적으로 고통스럽게 고백한 영화가 또 있을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마이크 바인더 감독의 <레인 오버 미>와 엮어서 기억과 망각, 미래를 도둑한 과거의 분탕질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면의 과학>은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보았을 것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던 시기였다.

 <이터널 선샤인>의 스토리텔링을 기대한 나로선 <수면의 과학>이 유치한 소꿉장난처럼 보였고, 무척 실망했다가

 몇 년 뒤 <비카인드 리와인드>를 보고 다시 감읍, 그러다 최근 그의 신작 <무드 인디고>가 나왔다는 소식에 불현듯

 <수면의 과학>이 생각 나 다시 봤거늘, 이게 왠걸. 이건 완전 걸작이야.

 

 <수면의 과학>의 가장 훌륭한 점은 이것이 미셸 공드리가 아마 평생동안 고민하고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지점들, 약점들, 악몽들을 영화화시킨 용기와 그걸 극적으로 재구성한 그의 작가적 능력과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인터뷰를 통해 나도 안 사실이지만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손이 놀랄 정도로 커져 당혹스러워 한다거나

 발명가 할아버지(영화 속에선 주인공의 죽은 아버지가 발명가였다는 설정)를 존경하고 발명가의 꿈을 키웠다는 점,

 달력 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고(실제로 그가 크리에이티브한 일을 원했으나 단순사무직을 했는지는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항상 거부당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 하는 병적인 소심함까지

 <수면의 과학>은 미셸 공드리 삶의 궤적을 따라가며 영화에 녹아든다.

 (무엇보다 영화 말미에서 여주인공이 "어린애처럼 굴지 마, 제발" 하고 호소하는 부분은

 비욕이 늘상 미셸 공드리에게 하는 조언, 내지 잔소리라는 점에서 유아적인 나르시시즘과 관계맺음의 미숙함은

 분명 미셸 공드리 본인이 잘 알고 인지하는 부분일 거란 생각에 더욱 가슴이 저민다)

 

 환상과 꿈, 가공된 이야기과 실제 실화, 달콤한 망상과 냉혹한 현실, 영화와 삶을 무차별적으로 넘나드는 이 이야기는

 비단 주인공의 스튜디오와 두 사람의 아파트란 공간적 배경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어디서부터 환상이고 욕망이고 망상인지

 가늠할 수조차 어렵게 뒤섞이고 만다.

 (조금 다른 소리인데, 욕망은 실존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고,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며,

 망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 실존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라고 대충 정리해본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꿈에 잔뜩 취해 날뛰다가 어느 순간 현실로 '튕겨나가' 여주인공의 아파트로 달려가

 (그는 그때까지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청혼을 하는 씬이다.

 하지만 어쩌면 주인공(아니, 미셸 공드리)의 망상은 여주인공이 옆집으로 이사를 와 피아노를 옮겨'주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책임한 친구들 탓에 피아노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게 되는데,

 지나가던 경찰이 이를 도와준다. 심지어 조율까지 확인해준다. 

 처음에 나는 이 장면이 '파리의 경찰들은 피아노도 잘 치네' 하고 재미있어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는 가히 비현실적인 장면에 가깝다. (이후 영화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묘사와 마찬가지로)

 더군다나 건반 일부가 고장나면서 피아노는 이제 장조를 연주할 수 없게 되고, 비통한 단조 가락만 나오는데

 이 역시 미셸 공드리의 '망상'이 우울하고 비극적으로 흐르게 될 거란 단초처럼 보인다.

 

 스테판은 운명적으로 자신과 공명하는 대상을 만나고, 순식간에 감화되어 사랑에 빠진다. (혹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후 스테판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꿈 속에서 인지하는데 촛점을 맞춘다.

 꿈 속에서 스테파니는 스테판의 나머지 반쪽처럼 묘사된다. (이름까지 스테판, 스테파니다!)

 하지만 그러한 운명적 만남은 노골적으로 망상처럼 묘사된다. 미셸 공드리는 분명 망상을 자위적인 도착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망상에 빠진 스테판을 희화화(혹은 비화화)시키며 한 걸음 물러나 슬프게 그려내고 있다.

 마치 자신의 청춘 노트를 감상에 빠져 읽는 것처럼. (그때와는 한결 다른 마음으로. 하지만 기질은 그대로인 채)

 

 이 영화에서 가장 현실적인 장면은 내게 마지막 결말부였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스테파니의 방을 찾은 스테판. 하지만 스테파니의 방 내부는 처음과는 달리

 너무도 '정상'적이고, 엄격하게 변모하여 있다. 어린 시절 고장난 장난감과 터진 인형, 러시아 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같던 분위기와는 현격히 다르다. 스테파니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 몹시 쌀쌀하고 차갑다.

 비로소 스테판은 스테파니(와 현실)을 마주한다. 자신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눈으로 본 대상과 현실의 대상의 괴리.

 그 간극 사이에서 스테판은 결국 망상을 택한다. 그는 꿈 속에서 '골든 포니 보이(이 역시 스테파니가 스테판을 지칭하는

 인형으로, 스테판 자기 자신이라 할 수 있다)'를 타고 스테파니와 함께 바다로 떠난다. 막연하고 뜻 모를 미래도, 과거도 아닌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다. 스테판이 갈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적 일관성으로 완성된 세계와 대상인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거나 훼방하면 그는 참을 수가 없다.

 (다른 얘기인데, 이 장면을 통해 나는 <이터널 선샤인>의 엔딩 씬이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미래가 아닌,

 또 다시 꿈으로 환원되는, 과거의 파편도 아닌 망상으로서의 한 풍경임을 확신했다)

 

 영화를 보면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Afterhour>가 나와 무척 반가웠다. 게다가 재즈-보사노바 풍으로 편곡되었다니.

 그런데 글을 쓰기 직전까지 노래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고생했다. 엘리엇 스미스의 <Last Hour>만 떠올랐다.

 영화를 보면서 뭔가를 만들고 싶어졌다. 영화나 소설, 음악이 아닌 물질적인 것을.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분해해 조명기기를 만들던 때가 떠올랐다.

 그런 식으로 온종일 마을을 거닐며 잡동사니를 모아 유용한 가구나 장난감, 소품을 만들며 소일하고 싶었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전구를 갈고, 단선된 전선을 갈아 접지하고, 납땝질을 하여 처음의 의도와는 너무도 다르게

 다시 환생한 물건들을 만들고 싶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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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