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방앗간에 관한 기사를 읽은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기사 링크)
한겨레 토요판은 가끔 보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삶의 방향을 뒤흔들만한.
(인터넷 신문도 이런 감흥과 집중력을 유지케 할까. 비관적이다)
지역 농산품 유통을 아이템 삼아 큰 수익과 나름의 지분을 빠르게 획득하고 있는
밥집 '소녀방앗간'과 김가영 씨는 관념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중인 오늘날
큰 주목을 받기에 적합한 요소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지역, 환경, 공동체, 청년 창업 등.
(그러고 보니 한겨레엔 김가영 씨를 위시한 '정력적인' 젊은 여성에 관한 글들이 종종 실린다.
또 얼마 전엔 '차라리 혁명을 준비하렴'이란 다분히 패색 짙은 정태인 씨의 칼럼에선
이러한 젊은 여성의 파워, WE CAN DO IT, 를 예찬하고 있거나 마지막 대안 정도로 여기는 인상마저 느껴진다.
상징 체계로 넘어간 관념 자본주의 체제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좌파들이 겨냥한 '새로운 주체'랄까.
도시 재생, 마을 만들기는 확실히 새로운 주체를 모색할 수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의 새 경향과 준거 틀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지만, 단순한 전근대-근대로의 복귀, 퇴행이 아니라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소녀방앗간 등의 청년 창업, 언니네 텃밭 등의 지역-환경 사업, 일련의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중심의 마을 공동체 재건이
이명박 정부 말에 실업률 저하를 위해 막무가내로 몰아붙인 사회적 기업 및 협동조합 지원 드라이브에
미끄러 들어가지 않기 위해선 좌우간 나도 잘 모르지만 모종의 독보성이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또 다시
그럴 듯한 연기나 사업 아이템으로, 결국 상징 체계 속의 또 다른 기호로 포획되어 관념 자본주의의 세계에 편입될 것이다.
그럼에도 소녀방앗간의 성공은 많은 영감과 힘을 주기 충분한 사례일 것이다.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시골 할머니들의 텃세를 '뚫고', 그 다음 도시에 거래처를 '튼' 것.
아, 정말 하면 되는구나. (졸라 어렵겠지만) 나는 뭐랄까, 이런 건 만화에나(시마 부장 같은) 등장하는 비지니스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녀는 정말 '한' 것이다. 하면 되는 것이다. 검은띠 한국인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정말 멋들어지게 성공한 '마을' 충남 홍동의 사례는 가슴을 벅차게 한다. (기사 링크)
이미 한국의 오늘날을 오래 전부터 겪고 있는 일본에서 마을 만들기, 커뮤니티 디자인은 새로운 분야가 아니다.
도요타 직원 출신의 젊은이들이 섬에 들어가 지역 자본을 발굴하여 사업화시킨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링크)
마주하는 사람과의 눈빛과 살의 접촉은 상징 체계의 기호 교환에 길들여져 매트릭스 세계에 지나치게 잘 동기화된 우리에게
이제는 이씨 조선 왕조의 옛일처럼 향수 내지는 불가능한 역사가 되었다. 오늘날 역사는 가치를 상실했는데,
유일불변의 진리가 항구적인 실종을 맞으며 공동의 역사는 동시에 종언을 고한 것이다. 과감히 말하자면 오늘날 역사와 진실을
논하는 것은 치명적인 함열(싱크홀과 같은 내부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역사와 진실을 갖고 있거나 차용한다. 여기서 진실은 결코 중첩되지 않는다. 세월호가 시사하는 사실은 이것이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상징 체계에서 근거로, 샘플처럼 몇 개 남겨 놓은 유산으로 작용할 따름이다.
이것엔 큰 의미가 없다. 아니, 적어도 근대 이전 사물에 마법적인 위상을 부여하며 사유하던 때와 같은 의미는 없다.
사물이 기능으로 전환되면서 내재된 의미는 상징 체계 속 기호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뜨거운 직관의 세계, 눈빛과 접촉과 요동치는 삶의 흐름, 바람의 노래, 구름의 그림을 우리가 믿는다면, 갈망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감히 전망하건대, 추후의 난투는 뜨거운 직관의 세계와 차가운 상징 체계의 대립과 긴장.
시골 할머니란 기호를 뚫고 소녀방앗간의 김가영 씨는 접촉을 했고, 욕을 먹어가며 도둑 농사를 지었으며,
결국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실제적인 만남과 관계를 이룩했다. 소녀방앗간의 성공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 있다.
몇 년 전, 나는 지역 문화를 말하면서도 지역을 몰랐고, 청년 문화를 말하면서도 청년을 멀리 했다.
지역성의 소멸과 청년이란 세대적 구분의 무용함을 간파해야 한다.
각자에게 여전히 고향이 유효한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느 지역에서 느끼지 못한 고즈넉함을 준 수동의 침묵에
구원 받는 기분이었다. 설령 고향이 아닐 지라도 우리가 전력투구할 만한 곳은 상징 체계가 아니라 어느 지역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할 것을 만들어야 한다. 할 일이 없더라도, 빗자루를 뺏어서라도 할 일을 만들어야 하고,
욕을 먹어가며 축제를 벌여야 한다. 그런 '이례적인 상황'을 어떻게 교류하고 나누며 항구적인 순환으로 자리매김할지에
대해선 좀 더 고민하기로 하며, 또 난 그녀처럼 세상을 이롭게 하진 못하더라도,
사람을 믿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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