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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난방을 도시가스나 등유 내지는 전기장판으로 해결하고 있겠지만 남양주에선 아직까지 난로, 그러니까 나무 장작을 연료로 하는 방식이 유효하다. 이는 시각적으로나 후각적으로나 아주 근사하지만 단 하나의 단점이 있다면 땔감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는 것, 그리고 땔감을 마련하는 행위는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
오전 내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앞부분을 번역했고, 식사 후에는 땔감 마련하기에 나섰다. 집에는 나뿐이었고, 제대 이후로는 처음 입어보는 미 공군 점프슈트까지 착용(군대에서 챙겨온 깔깔이 바지까지 껴입었는데 입는 순간부터 땀이 차리란 걸 직감할 수 있있다), 갈색 체크무늬 중절모까지 쓰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죽은 나무를 줍기 위해 뒷산을 오르는데, 이웃집 부부가 아주 조심스럽게 누구냐고 물어왔다. 하긴, 공군 점프슈트 위에 용이 그려진 화교식 점퍼를 입고 손도끼를 쥔 채 산을 오르는 청년을 본다면 모두가 겁에 질릴 것이다. 나는 앞집에 살고 있으며, 땔감을 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뭔가, 프라이빗한 남의 공간을 마구 침탈하는 기분이 들었다.
산에는 죽은 나무가 뜨문뜨문 떨어져 있었다. 굳이 깊은 산까지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산의 초입에서 나는 나뭇가지들을 주울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밤송이에 찔리긴 했지만 아무튼 소득은 괜찮았다. 마당까지 질질 끌고 와 시커멓게 녹이 슨 톱으로 슬근슬근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나무는 좀처럼 잘리지 않았다. 땀이 송골송골, 깔깔이 바지 안으로 맺혔다. 그것은 원래 영하 날씨의 혹한기 때나 입는 것이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드는 생각인데, 기름을 대체하기 위해 원시적인 인간의 체력만을 쓰는 것은 아주, 아주 혹독한 일이다. 차를 타면 5분에 주파할 거리를 30분 내내 걸어온다거나 실내 온도 몇 도를 올리기 위해 이렇게 톱질을 온종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기분은 아주 좋았다. 몸을 쓰는 일, 누군가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한, 기본적으로 무의미하면서 전방 주시 운전처럼 잡념을 허락치 않는 노동은 실로 신성하다. 이를테면 설거지, 잡초 뽑기, 그리고 톱질 등등. 아, 운동 가운데서는 수영이 포함될 수 있겠다. 런닝이나 웨이트 운동은 짜증날 정도로 힘들지만 수영은 특성상 죽음의 문턱에서 아슬아슬하게 유희하는 종목이므로 짜증이고 투정이고 할 수가 없기에, 집중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수확한 나무들을 모조리 베고, 마당의 장작 더미에 쌓으니 흥부적인 쾌감이 느껴졌다. 겨울 축적의 쾌감. 녹슨 톱으로 낑낑거리느라 죽을 맛이었는데, 어깨 저린 건 둘째치고 장작 밟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런 고단함도 사라졌다. 하여, 이차 수확에 나섰다. 이번엔 이웃집 부부가 볼 수 없는 다른 산으로. 넝쿨을 피해 강아지처럼 수그린 자세로 산을 올랐다. 몇 차례나 죽은 나뭇잎들로 푹신푹신한 바닥. 땔감으로 적당한 죽은 나무를 발견하고 횡재했다 싶었다. 워낙 커서 끌고 내려오는 데에 애먹었다. 넝쿨에 걸려서 이리저리 잡아당겨야 했다.
심기일전하고 다시 톱질을 하려는데, 뭔가 불안하다 싶더니만 이놈의 톱날이 뎅겅 부러지는 게 아닌가. 공구 서랍에서 다른 톱을 찾았지만 상태는 더 끔찍했다. wd40을 범벅으로 뿌렸지만 별 효능이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차를 끌고 동네의 철물점을 찾았다. 새로 생긴 철물점엔 다른 손님들이 많았지만 기본적으로 접대하는 자세가 형편없었다. 친절과 배려라곤 조금도 없는, 자신이 응대를 하는 게 자존심 상해 참을 수 없단 걸 구태여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머저리였다. 더군다나 톱들은 모두 비쌌다. 기가 막혀 그 이유를 물어보니 일제라나. 얼른 뛰쳐나왔다. 다음의 철물점은, 중학교 동창의 부모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점프슈트를 입고, 맥 드마르코 같은 모자를 쓴 중학교 친구를 알아보진 못하겠지. 다행히 동창의 어머니는 나를 몰라봤고(모른 척했을 수도 있다), 톱도 조금 쌌다. 모조리 베어주마, 하는 각오로 다시 집으로 귀환. 라디오에서 배칠수와 영미 씨? 누군가가 신청곡을 받아 짧게 성대모사를 하는 프로그램을 들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자아내는 방송이었다.
새 톱을 스르릉 꺼내 나무를 베는데, 신세계였다. 나무가 단칼에 베이는 것이었다. 전까지 녹슨 톱으로 흥부 부부가 박 썰듯이 낑낑대던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아무튼 난 신이 났다. 산에서 가져온 나무들을 단숨에 베었다. 장작 더미도 제법 높이가 쌓였다. 몸이 많이 피곤했지만 톱질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이건 나로서 좀 이상한 일이다. 오버드라이브, 그건 나와 맞지 않는다. 난 항상 그만 두어야 할 때를 잘 알았고, 거기에 순응하며 무리하지 않았다. 항상 적당한 수준에서 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과거의 나라면 그만 두었을 때를 훨씬 초월하곤 한다. 어제도 그랬다. 일본어 번역을 하다 탄력을 받아 그날 밤 내내 뭘 했는지는 비밀이지만. 아무튼 마당에 쌓여 있던 나무까지 손을 댔다. 상당히 고단한 작업이었다. 산에서 주워온 죽은 나무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한 각목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난 굴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슥슥삭삭 베었다. 깔깔이 바지와 점프슈트 안은 이미 땀으로 젖었다.
모든 장작을 베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다. 소파에 앉아 넋을 잃고 잠시 땅콩 쿠키를 먹다가 침대에 들어가 재즈 라디오를 들으면서 책을 읽었다. 중고 서점에서 산 <거리의 미학>이란 책이었는데, 일제 시대에 출판된 것처럼 절반이 한문인 데다가 일본식 번역투가 역력했다. 그래도 건축과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감흥을 준다. 몇 줄 인상적으로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30분 정도. 아마 <센트럴 파크에서의 스케이팅>을 듣던 중일 게다. 해가 지기 전에 체육관을 다녀왔다. 아버지와 둘이 청하를 마셨다. 아버지는 가문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셨다. 나무의 몫까지 두 배로 열심히 살아야겠단 한낮의 다짐이, 톱질의 뽀얀 가루처럼 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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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째 기분이 좋지 않다. 혼자 진단컨대, 나는 무력함에 떨고 있다. 인형의 집처럼, 이곳은 안전하고 충분하지만 한편으론 내 자존심을 마구 상하게 하는 것. 하소연할 수 없이, 그저 견디는 수밖에, 한편으로는 그것이 지긋지긋하고, 스스로를 위무하는 나 자신이 견딜 수 없이 한심하다.
오후 내내 침통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차에 올라탄 순간, 퍼뜩 북한강이 보고 싶어졌다. 바다처럼 거창하진 않지만, 언제나 조용히 존재하는 곳. 바다와는 또 다른 환기를 주는 강의 풍경이 보고 싶었다. 다행히, 도로가 새로 정비되면서 북한강으로 가는 길은 정말 스트레이트란 말이 이때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단숨에 갈 수 있었다. 신호만 걸리지 않았다면, 과속을 할 수 없는 스노우 타이어만 아니었다면 10분이면 달려올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빨리 북한강에 가서 뭐하나. 석관동에서도 중랑천에 갈 때 2~30분은 족히 걸렸다. 자전거로 걸어가는 도로가 은근히 빙 돌아가는 통에... 꽤 귀찮은 여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어린 시절 아버지와 종종 낚시를 하러 왔던 원대성은 자전거 도로가 신설되어 예전의 경관은 사라져 있었으나 허름한 낚시 가게가 그대로인 것처럼 어렴풋한 기억의 풍경이 사금처럼 남아 있었다. 차를 세워놓고, 낚시 가게 아래로 아슬아슬 형성된 오솔길을 따라 강가로 내려왔을 때, 선글라스의 갈색 시야 너머로 들어온 풍경이 아름다웠다. 버릇처럼 디지털 카메라, 용산에서 거금을 들여 수리한 소니 카메라, 를 "복원 키트"에서 꺼내려는 때에, 기계적인 기록 탓에 심상에 내려앉는 서정의 효과가 무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어차피 사진을 찍으니까 나중에 생각이 나면 이때의 감동을 찾아보면 되잖아, 하고 안일하게 순간을 맞이하는 느낌. 이런 맥락이 아니었지만 언젠가 보드리야르가 대담 중에 했던 말, "사진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을 말해선 안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삶의 마법을 구태여 시각적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에서부터 만물의 역사는 타락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물과 나의 관계부터... 북한강을 디카로 찍으려는 나처럼.
이렇게 말은 했지만 나는 강변의 풍경을 디카로도 찍고, 필름 카메라, 이건 종로에서 마찬가지로 거금을 들여서 수리했지, 로도 찍었다. 얇은 셔츠와 점퍼만 덜렁 입고 나온 탓에 조금 서늘했지만 덕분에 정신이 번쩍 났다.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 강가에 서서 황량하게 공중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볼 때부터? 난간에 기대어 멈춘 듯 고요히 흐르는 북한강을 보았다. 황량함. 남양주의 겨울은 있는 힘껏 느린 속도로 황량하게 죽어가는 풍경. 하지만 이 풍경은 내 것이 아니다. 광화문에도 그랬고, 지금으로선 세상 모든 곳이 그렇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과거의 기억들뿐인데, 그 기억이란 부정확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지금은 상실된 내면의 풍경이다. 하소연조차 불능에 빠진 시인.
북한강을 쉽게 올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을 지도 모른다. 남양주. 이곳에서, 아무도 들리지 않는 발악을 벌이다, 진공 상태의 불길처럼 서서히, 시시껄렁한 평생을 보내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겁난다. 야심에 스스로를 불태워 죽는 것. 하지만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건 발악을 하지 않아서다. 발악을 하는 중엔 무섭고 초조하고 안달복달, 그런 걸 느낄 겨를도 없을 것이다.
땅거미가 질 즈음, 체육관으로 돌아와 러닝머신에서 5km를 뛰었다. 작년 여름부터 꾸준히 해왔으니... 1년 반이 넘게 뜀박질을 계속 하고 있는 셈이다. 대견하다! 이것만으로 훌륭하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근육은 이상할 정도로 붙지 않는다. 오버 웨이트를 하지 않아서겠지. 이론상으로는 차츰차츰 무게를 늘려가고, 또 거기에 맞게 근육이 늘어가야 맞는데 현실의 나로선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 10kg을 들면 내일은 15kg을 들어야 하는데, 10kg 들기에도 버겁다. 그 한계. 그 죽을 것 같은 버거움을 초월해야 근육이 붙을 텐데, 늘 현상 유지다. 복근 운동을 하고 있는데, 관리인 아저씨가 괜히 내 앞까지 왔다가 말없이 돌아갔다. 체육관엔 나밖에 없었고, 나는 석 달째 회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조마조마하며 누워 있었다. 그가 덜컥 소리를 지르며 망신을 주면 어떡하지. 능청을 떨면서, 아 벌써 돈 낼 때가 됐어요? 하고 웃어야 하나, 아니면 지갑을 두고 왔다며 통사정을 해야 하나, 어쨌든 구질구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돈을 낼 수 있을 주머니 사정 때엔 그가 없고, 내가 돈이 없을 때 그가 눈치를 준다. 항상 이런 식이다. 조만간 돈이 들어오면 두 달치라도 내야겠다.
어둑어둑한 저녁, 체육관에서 나오기 전부터 아삭아삭한 식감의 야채를 잔뜩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는 야채를 몽땅 채썰어 먹어야지 싶다가 문득 말라비틀어진 양파 하나만 덜렁 나올 것 같은 두려움에 농협을 들렸다. 목표는 연근. 그런데 너무 비쌌다. 하나에 5천원, 큰 건 7천원. 말이 되나? 철이 아닌가? 기가 막혔다. 그냥 집에 와서 냉장고를 뒤졌다. 마늘, 양파, 당근, 파, 양배추. 이 정도면 됐다. 마늘과 양파를 잘게 썰면서, 헤어진 여자친구를 생각했다. 요리를 아주 좋아하고, 아무튼 요리 그 자체였던 그녀와 헤어진 이후로 나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뭔가,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아무튼 상당히 오랜만의 요리였다, 라고 하기도 무안할 만큼 간단한 요리였는데 채썬 야채들을 간장과 굴 소스를 베이스로, 차례로 후라이팬에 볶은 다음 따뜻한 밥 위에 계란 노른자를 얹어 먹는 것. 깻잎을 잘게 찢어넣는 게 유효했다. 요리는 참 순간의 선택이 모든 걸 좌우한다. 눈에 보이는 걸 막 넣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별 거 아닌 게 맛의 전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오늘 요리는 대만족. 약간 덜 익은 양배추의 씹는 맛과 계란의 조화가 참 행복한 맛. <아빠는 요리사>를 보면서 혼자 식사를 했다. 이 만화 역시 헤어진 여자친구를 대변하는 작품.
빨래를 널면서 혼자 소리를 질렀다.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힘이 안 나기 때문에. 누가 옆에 있으면 소리 지르기도 무안하지만, 이렇게 혼자 집에 있을 땐 기세가 산다. 하아압! 기합을 불어넣자.
정빈이가 시를 또 보내왔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감읍하여 힘을 내 시를 보냈다. 워크샵 핑계로 루틴을 잃어버린 게 악수였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꾸역꾸역 보냈던 시들이 다시 읽어보니 형편없는 졸작들인지라 '안 되는 놈은 뭘 해도 안 되는군' 하는 생각뿐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연애더라도 발악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누구나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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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락방엔 어울리지 않게 두 개의 영화 포스터가 걸려 있는데, 하나는 마릴린 먼로가 휴양지에 엎드려 육덕미를 과시하는 엽서 크기의 사진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직 계통의 정장을 입은 드류 배리모어가 지미 팰론 어깨에 기대어 지긋이 정면, 그러니까 책상에 앉은 나를 바라보는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 포스터가 그것이다.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는 닉 혼비의 소설 <피버 피치>를 영화화한 <퍼펙트 캐치>가 한국에서 개봉하면서 이처럼 노골적이면서 별 매력 없는 제목이 붙었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다양한 제목으로 검색이 가능하며 원작자인 닉 혼비와 주연 배우로 분한 드류 배리모어가 제작 단계부터 참여했다. 영화사적으로든, 흥행적으로든 괄목할 만한 성과는 당연히 없으며 오늘날까지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정신 구조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드류 배리모어의 열렬한 팬이라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그녀의 팬도 아니고(이 영화 전까지 드류 배리모어가 출연한 영화는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닉 혼비의 소설 역시 본 적이 없다. 포스터에 선전했다시피 이 영화는 카메론 디아즈를 유명하게 만든 천박한 소프트 포르노 영화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의 패럴리 형제가 연출하긴 했지만 코엔 형제처럼 거장도 아니다. 기대치 제로의 상황에서 내가 이 영화를 찾아본 이유는 두 개 정도가 될 것인데, 하나는 군 생활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영화 중 하나였던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여운을 느낄 수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 심리, 그리고 다른 하나는 포스터 속 드류 배리모어의 모습이 퍽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어젯밤은 좀 복잡한 머릿속을 비우고 싶었고, 취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영화를 틀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아주 불쾌하다. 나는 격노하면서 영화를 봤는데, 다른 무엇보다 영화의 허섭한 만듦새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형편 없는 영화들 속에서 나름의 빛을 발견하는 데에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던 나였기에, 이러한 실망은 다소 곤혹스러웠다. 뭐, 소비 사회의 인정 투쟁과 지위 욕망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는 건 넌센스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 양반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고 미쳐 날뛰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배우들 역시 '나는 입금된 만큼만 연기하면 끝이다' 이렇게 임하는 것처럼 떠들썩하게 날뛰긴 하는데 눈빛 안으론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듯하다. 그들조차 이입이 안 된다는 소리 아닐까.
영화의 출발은 아주 단순하고, 어찌 보면 매력적이다. 뉴저지에서 보스톤으로 이사 온 외로운 소년이 보스톤 레드삭스의 광적인 팬이 되고, 그런 남자와 연애를 하면서 갈등을 빚는 커리어 우먼의 좌충우돌 로맨스 코미디. 닉 혼비 자신이 레드삭스의 팬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그나마 재미있고 볼 만한 장면은 오로지 레드삭스와 관련된 씬뿐이다. (펜웨이 구장, 아예 지정석이 되어버린 곳에서 척척박사처럼 레드삭스의 역사 모든 것을 줄줄 꿰차는 사람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 심지어 이 영화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일밖에 모르는 커리어우먼과 야구밖에 모르는 레드삭스 팬의 사랑-우격다짐조차 야구 소재에 비하면 부차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 나를 분노케 한다. 생기 없이 요란한 소동이란 거다.
이 영화의 가장 끔찍한 장면은 결말부에서 홈런처럼 터지는데, 야구광에 실망한 여자가 다시 마음을 돌려먹는 계기가 바로 남자가 시즌권을 다른 사람에게 판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이다. (12만 달러에 육박하는 금액이긴 한데, 아무튼 좀 웃긴다) 물론 남자에게 야구와 내년도 전경기 입장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녀도, 관객도 다 알겠지만 그녀의 갑작스런 심정 변화는 어이 없을 정도로 급작스럽고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어느 정도냐면, 여자는 시즌권 판매를 말리기 위해 양키즈와의 플레이오프 경기 도중 필드로 난입한다. (일부러 살살 뛰는) 심판들을 피해 센터필드부터 내야석까지 달려온 여자는 남자와 감동의 키스. 환호하는 관객들. 에휴, 어쩔 수 없군, 하는 표정의 심판들. 이 모든 게 레드삭스 팬의 허황된 판타지임이 드러나는 순간. 이후의 전개는 더욱 노골적이다. 해프닝에 힘입어 레드삭스는 양키즈에게 세 경기가 뒤지고 있었음에도 나머지 경기에서 내리 4승을 거두며 월드 시리즈까지 진출, 파죽지세를 이어나가며 결국 챔피언에 등극한다. 마지막 경기에서 선수들과 방방 뛰며 기쁨을 나누는 남녀의 진한 키스는 당연지사. 그렇다. 이것은 밤비노의 저주(레드삭스 선수였던 베이브 루스를 양키즈에 매각하면서 보스턴은 한 세기가 넘도록 우승하질 못했다)에 히스테리를 일으키다 그만 맛이 가버린 야구광 남성의 워나비다. 물론 레드삭스의 팬들이라면 금발 커리어우먼과의 만루홈런을 서비스로 하여 맥주 6입을 소파 옆에 두고 파티를 벌였겠지만(보스턴이 배경이다 보니 사뮤엘 아담스도 자주 등장한다) 남양주 다락방의 나는 공감 제로, 격노만.
야구든, 아이돌이든 유난스럽게 광적인 애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나의 방식은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나만의 전유물이 되어야 할 대상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싫다. (심지어 스미스가 내한을 왔을 때에도 나는 '지들이 대공분실로 와야지 내가 왜 가냐'고 시건방진 소리를 했다. 하지만 대공분실에 찾아와도 나와 소주를 걸칠 게 아니라면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블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근의 예외적인 사례가 생겼는데 그것은 이소라다. 이소라 공연이라면 관객들 사이에서라도 보고 싶은 의향이 있다) 팬들은 자신이 받고 싶은 사랑의 양만큼 대상에게 행한다. 돌아오지 않는 사랑은, 반응 없는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다. 짝사랑은 무척 매혹적이지만 결국 자기 자신과 연애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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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삼각대 문우들과 전설적인 술자리를 또 가졌을 때, 그때 호쾌하게 권했어야 했는데 못한 말. (사실 우리는 항상 벼르고 벼르다 서로를 만나 각자 준비한 얘기의 삼할도 꺼내놓지 못하고 분위기에 넘어가 술을 퍼마시고 종국엔 기억을 잃는 식으로 술자리를 마감하는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술을 마시지 않고 담론을 발전시킨다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라든가 들뢰즈와 가타리라든가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 콤비들처럼 굉장한 지적 센세이션을 일으키지 않았을까? 한편으론 이 소주적 감정 없이 불처럼 뜨겁게 언쟁하는 게 가능한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때 나는 제안하고 싶었다. 미친 대작전을. 가족, 여자친구, 절친들을 모두 모아 스키 리조트를 가자고. 우리 중에 스노 보드를 멋들어지게 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키장 쿠폰을 끊고 겨울을 맞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김영삼과 생트 마리 해변처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바로 스키장과 삼각대 문우 아닐런지? 난 여전히 그런 미친 유대적 순간에 대한 애착이랄까, 갈망이 있나 보다. 그렇게 데이고도 매달린다. 조른다. 아직도 좋니? 하고 주변 친구들이 뭐라 말은 못하고 한심해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그런 자리가 좋다. 평생 잊지 못하는 그런 하루가 나를 살게 한다. 아무튼, 그때 이 얘기를 취한 김에 빼도 박도 못하게 정했어야 했는데.
어제 다리 운동을 하면서 음, 내일 근육이 좀 당기겠군, 하고 예상하긴 했지만 아침부터 몸이 안 좋았다. 깨진 전구처럼 자글자글 온몸이 박살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집에 혼자 남게 되자 대놓고 끙끙거리면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재즈, 나는 얼마 전부터 올레 티비의 재즈만 틀어주는 사티오 재즈 명반 1001선인가 하는 방송을 곧잘 듣고 있다, 를 들으면서 한 겨울 오전부터 몸이 안 좋아 침대에 누워 있노라니 군대 생각이 많이 났다. 마지막 겨울을 보내며, 나는 무척 아팠던 것이다... 지독한 감기였지만 나는 병장이었다. 나는 출근 도장만 찍고 바로 생활관으로 올라와 어둠 속에서 잠을 잤다. 군화도 벗지 않고... 시디 플레이어로 케니 드류, 듀크 조던의 피아노를 들으면서...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의 피아노를 들으면 그 선명한 기억의 풍경이 떠오른다. 하얗게 눈이 쌓인, 그 위로 오전의 눈부신 빛이 내리쬐고, 바쁜 다른 사람들의 일상과, 노곤노곤한 감기의 감각, 살얼음처럼 아슬아슬하게 회화를 그리듯 건반을 오가는 두 피아니스트들, 현란한 연주 속에 숨겨진 아주 심플한 '오리지널 테마', 꿈의 고원처럼 새하얀 눈밭 위에 서있는 듀크 조던 사진을 쓴 시디 재킷까지. 꺼내 보면 꽤 많은 군대에서의 아름다운 기억. 그때를 떠올리며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40분 가량을 잤다. 더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되기에 소리를 지르며 억지로 힘을 냈다.
스즈키 토미의 <이야기된 자기>를 다시 읽고 있다. 다시, 라고 하니까 예전에 독파했던 애독 서적을 다시 읽는 느낌인데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문학 관련 수업 때 하루키 소설을 갖고 리포트를 썼다가 강사가 아주 신랄하게 비판했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 썼다는 식의 적절한 지적이었는데 어쩌면 내 인문학적 열등감과 트라우마의 근원이 거기서 도드라진 게 아닐까? 아무튼, 그러면서 권했던 책이 토미(Tommy가 아니라)의 책. 나름 유명해서 다른 사람 집 서재에서도 많이 봤다. 윤형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나는 앞서 말했듯이, 가족이 외출하고 나만 남은 집에서, 침대에 반쯤 누워, 사티오 재즈 방송을 들으며 이 책을 읽고 있고, 괜찮은 재즈가 나오면 책 양장본 안쪽에 제목을 기입하곤 한다. 그런데 내가 갖고 있는 연필은 3H의 심이 아주 연한 것이고, 양장본은 아주 고급 용지라 써도 빛에 굴절시키지 않으면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간에. 그런데 어느 불란서 재즈 싱어(여성)가 부른 플라이 투 더 문의 불란서 버전을 들으면서, 왜 불어는 노래로 들으면 그닥 감흥이 없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불어의 일상 회화 자체가 이미 음악성으로 충만해서일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면 그 가수의 노래가 그냥그런 수준이어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푸시 캣이라거나 프란시스 골과 같은 1960년대의 샹송 스타들을 들으면 또 얘기가 달라지니까.
뭐, 그런 얘기입니다. 어서 난로 때우고 싶다. 한 시간 넘게 키보드를 치는 내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점점 곱는다. 그리고 문득 평생 가족과 같이 살면서 내 방에 틀어박혀 글만 써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소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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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내 다락방이 심심하다. 내 자투리 시간을 성실히 함께 하던 만화책들의 신선함이 탁해질 무렵, 바로 그 순간부터인 것 같다. 하루는 작정하고 (맨정신으론 좀 그러니까) 술을 왕창 마시면서 옛날 게임을 시작했는데 이틀을 가지 못했다. 영화도, 책도... 마찬가지였다. 할 것 없는 방구석에서 나는 너무나도 심심했다. 꽤 강렬할 정도로 싫은 감각이었고,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경험. 하지만 뭔가 대안이 없으면 오늘밤도, 내일밤도, 애인이 없는 모든 밤들을 그렇게 보내야겠지? 나는 꽤 노력했다. 용산 전자상가를 찾아가 <바이오 하자드4>를 사야지. 이 추운 겨울에 무슨 좀비 게임인가 싶지만, 난 원래 겨울에 비치 보이스를 듣는 놈이니까 상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다시 찾은 용산은 대부분의 게임 매장(뿐만 아니라 다른 상가도)도 말 그대로 허물어져 있었고, 겨우 한 블록 남은 상가의 게임 매장 사람들(지하에 유폐된 초능력자들 같았다. 콘 사토시 만화에 나오는)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 아유, 요새 <바이오 하자드4> 붐이에요? 엊그제부터 다 쓸어가네. 없어요, 없어. 정말 그랬다. 나온지 10년이 지난 게임의 리바이벌 소식은 내 알 바 아니지만, 그래도 큰 맘 먹고 서울까지 나왔건만 너무 한 거 아닌가. 운명에 굴복하기 싫어서 (울 것 같은 얼굴을 숨기고) 빨빨 돌아다닌 끝에 겨우 찾은 한 곳에선 일본판을 2만 5천 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아, 하나님이 정말 나한테 게임하지 말라는 거구나. 너 지금 게임 할 때 아니다. 게임하면 진짜 좆된다, 진짜. 그렇게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별 생각 없이 들린 소니 대리점에서 소니 디카(똑딱이) 수리비를 엄청나게 청구했다. 그 염병할 케이블은 한국에 재고가 없어서 다음주에나 보내준다고 했다. (글을 쓰는 지금까지 안 왔다) 올해 나는 필름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 두 개를 수리했는데 모두 엇비슷한, 나로선 상당한 금액의 수리비가 들어갔다. 뭔가 운명 같다. 게임하지 마라, 앞으로 사진 찍을 일 많으니 투자하는 셈 쳐라.
아무튼 덕분에 요즘 책은 많이 읽는다. 선물 받은 애처럼 온종일 읽는다. 메인은 작업을 위한 공부 겸 읽는 이론서, 비평서들이지만 하마터면 <바이오 하자드4> 할 시간에도 이젠 책을 읽는다. 하루키의 <포트레이트 인 재즈>는 생각보다 가벼워서 이틀에 독파했다. 남는 게 없는 책. 하루키도 러닝머신 위에서 대충 생각한 몇 자를 그대로 원고로 넘긴 느낌이다. 심지어 재즈를 듣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으니, 이는 좀 심각한 거 아닌가. (뭐, 나도 제이비엘 스피커에 엘피 레코드로 소파에 누워 제임슨을 마시며 들어보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 궁시렁거릴 수밖에) 그래도 읽는 동안은 재밌었다! 하고 넘어가려는데 '리뷰 알바'를 하면서 문득 책에 나온 문구가 떠올랐다. 그것은 줄리안 캐논볼 애덜리를 소개하는 글이었으며(그는 이 책에 내가 들은 몇 안 되는 재즈 뮤지션 가운데 하나이며, 다음의 인용문은 그를 지칭하여 묘사한 게 아니란 걸 참고했음 한다)
"진정 뛰어난 음악이란(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죽음을 구현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암흑으로의 추락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대개 악의 과실에서 짜낸 농밀한 독이다. 그 독을 마실 때의 감미로운 경련, 시간의 흐름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강렬한 뒤틀림이다."
음,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니저러니, 하루키는 글을 참 잘 쓴다. 다 읽고 나면 뭔가 속은 느낌이랄까, 그런 찝찝함이 있는데 그것 역시 다 그가 글을 잘 쓰기 때문이고, 그런 찝찝함을 읽는 동안 만큼은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것도 그가 글을 잘 쓰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는 소리다. 내가 이 문장을 떠올린 이유는 '알바' 때문에 보게 된 수많은 글들에 결국 부재하는 그 절박함. 문학은 결국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두 절박함이 마주치는 순간의 힘 아닐까. 본질적으로 나아가면 절박함의 근원을 죽음에서 찾을 수 있고, 결국 예술은 죽음에 대한 경미한 체험이 된다. 그렇다고 진짜 죽어선(혹은 진짜 죽으라면) 곤란하다. 거기서부턴 사건이 된다. 아무튼, 우리가 삶에서 체험하는 절박함은 결국 생에 주어진 조건 속에서의 투쟁과 반동 사이의 긴장, 딜레마이고, 위대한 예술은 죽음 언저리를 우리 대신 다녀옴으로써 우리에게 거대한 정서적 환기를 시킨다. 그런데 특히나 내가 '알바'에서 본 글들은 분명 삶에서 건져올린 일기, 혹은 전기문들임에도 거짓말에, 또 다른 거짓말을 보태는 구태의연한 윤리 교과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죽음이란 말끔히 소독된 양로원에 모여앉아 걸그룹 아이돌을 보는 노인들 같은 느낌이랄까.
책을 많이 읽고 있어서인지, 눈의 피로에 대한 의식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평소에도 눈을 쉬질 않잖아? 책을 안 보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할 테니... 그것만이 아니라 삶의 거의 모든 정보를 시각 요소로 접하니 눈은 정말 쉬질 못하는 것이다. 끔찍했다. 요새 문학이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는데, 어젯밤 국방 라디오를 듣기도 했고, 눈이 아닌 귀로 듣는 문학에 대한 아이디어가 조금 생겼다. 나만 생소해서 그렇지 해외든 국내 어디든 낭송회 형식의 문학 행사가 많긴 하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우리들만의 낭송회"는 무척 아름다웠다. 또 재미있었다. 문학적이었고. 그런데 요새 새로이 관심 갖게 되는 낭송회, 그니까 "우리들만의 낭송회는 아닌 문학적 순간 창조로서의 낭송회"는 어떤 분위기일까? 가령 아이오와 대학 주변부에서 수시로 행해지는 작가들의 낭송회 자리. 몇 안 되는 독자들, 그것도 동료 작가들, 이 피곤한 논쟁을 일삼는 그런 자리인지? (홍대 클럽의 평일 공연과 다를 게 뭔가!) 보들레르의 <뱀파이어>를 카바레 탁상 위에 올라가 마구 낭송하는 '랭보 삘의' 불란서 양아치 동영상이 있나 싶어 유튜브에 검색해봤더니 기절초풍할 만한 것이 있긴 하다. 차마 말할 순 없고, 나중에 검색해보시길. 정훈병 시절, 정훈장교와 고흐전(展)을 갔을 때의 충공깽이 새록새록.
아, 할 것 없는 방구석, 그렇다고 눈을 쓰긴 싫고, 그럼 무엇을 해야 하나. 결국은 연애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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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사히 신문(2015년 7월 13일자)의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기사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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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숨겨진 곳을 탐구하는 야마가타 요시카즈
山縣良和, 1980년 1월 15일생
"패션에 관심을 갖고 복장을 상상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실 본질적인 것은 복장의 '물성(モノ)'이 아니라
'사건성(コト)'입니다. 즉 패션이란 지금, 여기(事象)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것에서 늘 변화하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혼처럼 말입니다."
숍에 진열되는 옷은 별로 만들지 않고, 패션쇼에선 서사(物語性)를 중시한다.
예를 들면 옷감을 말아 "신"과 거대한 갈퀴 의상을 두른 "칠복신(七服神)"을 발표하는 식의.
일반적인 패션 브랜드의 존재 양식이란 남다른 전위적인 크리에이션을 통해 예술계에서도 주목을 받는 것이다.
2013년 10월에 "MIKIO SAKABE"의 디자이너 미키오 사카베(坂部三樹郎)와 함께 프로듀싱을 맡은
전람회 "절명전 : 패션의 비경"에서는 살아있는 인간 모델이 마네킹으로 변화하는 등,
삶에서 죽음으로, 삶의 내용을 뒤바꾸며 패션의 윤회전생을 표현했다.
"계절이 바뀌듯 매우 자연스럽게 변화해 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었어요.
12월에는 같은 전시의 특별 기획으로 국립신미술관에서 실험적인 패션쇼를 하러 갑니다.
하나의 전시가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는 것 또한 윤회전생의 이미지와 통하는 것 같아요."
패션에 흥미를 안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자기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던 것이
"쩌는(格好いい) 옷을 입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타고난 탐구심이 더해져 패션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었고,
알면 알수록 깊이에 매혹되면서 런던의 명문 센트럴 세인트 마틴 미술대학의 패션 디자인 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2007년에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했고, 현재는 패션 디자인 교실 "여기의 학교(ここのがっこう)"를 주재하고 있다.
"상업적인 면만으로 패션은 천박하다고 말하는 건 싫어요. 인간이 옷을 입는 행위의 리얼리티와 사회적 배경 등,
소비활동과 연결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부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양쪽을 알고 있는 세대예요.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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