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야독 1

2016. 5. 18. 01:32 from blur girl's diary

 

얼떨결에 농사를 하게 되었다. 집 앞 텃밭 일구는 정도지만.

이상할 정도로 나는 시원하게 수락했고, 그 즉시 종묘상에서 갖가지 모종들을 샀다.

아버지는 나를 '후계자'라 소개했고, 종묘상의 젊은 부부는 친절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오라고도 했다. 나는 커다란 밀짚모자도 샀다.

앞으로의 기록은, 농사와 텃밭 가꾸기, 작물 재배, 그것들을 뭐라 말하든,

나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고자 적는 일지에 가까울 것이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하자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나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그것도 알람 소리가 아니라 나로선 납득할 수 없는 행정 문제,

요 며칠째 나를 괴롭히는, 관련한 전화가 나를 깨웠다. 꿈에서 나는, 존경하는 선생님이 지도하는

세미나에 대해 회의하는 모습과 전화 부스처럼 생긴 텔레포트 장치에서 순간이동에 성공하는 순간을 보았다.

 

작업할 때마다 입는 미 공군 점프 슈트와 어제 산 커다란 밀짚모자와 함께 텃밭 이동.

"쑥쑥 비료"인가, 동물 분료로 만들었다는 비료 세 포대를 짐차로 옮겼다. 바퀴가 한 짝뿐인 거라

균형 잡기가 어려웠다. 그 사이 아버지가 나왔고, 노회한 농부처럼 내게 지도를 해주셨다.

 

 

우리는 밭을 세 구역으로 나눴다. (야생 취나물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방치 존'까지 헤아리면 네 구역)

아버지의 말에 따라, 우선 표면이 바싹 마르고 잡초가 피어난 밭의 땅을 가볍게 뒤엎었다.

삽을 찔러넣었을 때 생각만큼 흙의 저항이 강하지 않았다. 텃밭 말고 '메인 밭'의 경우는 사막처럼 건조하고

돌이 많아 호미질조차 어려운데 말이다. 또 이곳에는 돌조차 많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하길,

농사를 오랫동안 거듭한 땅엔 돌이 없고 흙이 마치 '콩가루'처럼 포슬포슬 날린다고 했다.

이 텃밭 같은 경우도 몇 해 동안 고추니 상추 따위를 키운 곳이다. 그곳을 이제 내가 맡은 것이다.

 

을 다 엎은 다음 "쑥숙 비료" 개봉. 포대를 눕힌 다음 삽으로 십자로 찔러 배를 갈랐다.

비료는 젖은 재처럼 시커멓고 기름기가 흘렀다. 생각만큼 나쁜 냄새는 나질 않았다. 제법 신기하기도 했다.

비료를 삽으로 퍼서 뒤엎은 땅에 골고루 뿌렸다. 그리고 쇠스랑으로 비료와 흙을 섞어주었다.

(아버지 표현을 빌리면, '잘 얼버무린')

 

 

야생 취나물이 쥬라기 공원의 랩터처럼 자유분방하게 자라도록 냅두는 방치 존을 제외하고,

제1구역은 청양고추를 심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흙을 모래성 쌓듯이 모은 다음 가운데 손가락으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모종을 깊숙이 찔러넣고, 흙으로 다시 잘 덮으면 끝. 단단하게, 튼튼히 '봉분'을

모아주는 게 관건이라고 한다. 이를 약하게 심으면 바람 강할 때 고추대가 날아갈 수도 있다고.

젖은 흙이 장갑에 마구 들러붙어 맨손으로 해보았다. 축축한 흙의 감촉. 이렇게 흙을 만져본 것도 참 오랜만.

하지만 비료가 피부에 닿으면 좋지 않다는 말에 당장 손을 씻고 장갑 재착용. 제1구역은 그렇게 마무리.

 

 

제2구역은 (덜 매운) 고추와 상추다. 내가 1구역에 있을 동안 아버지가 상추를 다 심었다.

방식은 아마 비슷할 거라 생각된다. 상추 모종이 굉장히 많았는데, 내가 산 건 꽃상추(라고 아줌마가 말했)다.

아, 그리고 고추를 심을 땐 흙은 30센티 정도 높이로 높게 올린 다음 검은 비닐로 그 위를 덮어('멀칭'?)

지지대를 박고 등등의 작업을 해야 했는데, 아버지는 그냥 심었다. 귀찮아서, 라고.

사실 나는 인위적인 모든 것들이 깨림칙한데, 그 중 검은 비닐이 대표적이다. 메인 밭에 농약 치자는 것도

내가 싫다고, 자청해서 잡초를 뽑고 있다. 아무튼, 가능하면 인간의 꾀를 최소화하고 싶다.

나의 개똥 철학이 얼마나 더 오래 갈 진 모르겠지만, 고집을 부릴 수 있을 만큼 부려보자.

인간이 싫다. 하루종일 말없이 흙을 만지고 싶다.  

 

 

라고 말했지만 제3구역은 비닐 멀칭을 했다. 이유는? 모른다. 아버지 마음이었다. 나는 그냥 하라면 했다.

제3구역은 두 파트로 나눠 한쪽엔 가지를, 한쪽엔 오이와 방울 토마토를 심었다.

오이 같은 경우, 다른 작물과는 다르게 비닐 정중앙이 아니라 좌우 양옆으로 심는 것이라고 한다.

이유는? 모른다. 아버지가 농법 기술서도 아니고, 체계적인 건 내 스스로 공부해야 할 듯하다.

토마토, 가지.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무럭무럭 자라다오. 친구들에게도 줄 만큼 많이 열려다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커다란 (죽은) 소나무가 떡하니 있어 온종일 그늘 진 곳이었는데,

최근 면사무소에 요청해 잘랐다. 덕분에 조금 볕이 들어온다. 전엔 잘 보이지 않던 아카시아 나무도

멋스럽게 보인다. 아카시아를 좋아하던 외할아버지가 오래 전 심은 것이라고 한다.

텃밭 뒤의 돌들도 왠지 일하다 쉬어야 할 것처럼 생겼다. 모기만 없으면 좋겠다.

 

 

 

이대로 일이 끝났으면 뭐, 아름답고 건강한 삶이었을 텐데 메인 밭(아버지 담당)을 도와야 했다.

메인 밭은 공사장 흙을 받아 돌과 자갈이 잔똑이고, 뙤약볕이 온종일인지라 아주 혹독한 환경이다.

나는 한 달 정도 이곳의 잡초를 다스리려고 했으나 괭이마저 박히질 않는 땅에 점점 지쳐가던 터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해야 할 일이었다. 모이지 않는 흙을 어렵게 개간하며, 고추 심을 준비를 다시 했다.

비료를 뿌리고, 비닐 멀칭을 하고, 물을 주고, 모종을 심고, 흙을 덮고.

하던 중 아침 식사를 하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잠시 귀가. 오랜만에 아침 식사를 달게 먹었다.

 

할 일이 많은 하루였으므로, 식사 후 바로 밭을 일궜다. 처음이라 그런지, 온몸이 박살 나는 것만 같았다.

지난 주말부터 이상하게 몸이 삐그덕거리는 것만 같다. 금요일 운동과 주말 알바의 피로가 풀리질 않는다.

어머니가 타준 발포 비타민 음료에 의지하여 비틀비틀, 고추 모종 작업을 완수했다.

끝나고 방에 돌아온 시간은 1시 40분이었나. 오전 중에 끝내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할 게 많았다.

윤해동의 책을 읽는데, 가끔 꾸벅꾸벅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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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