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최근 전입 온 아이가 쭈볏쭈볏 구경을 왔다.
어쩐지 피아노를 연주해보고 싶어 하는 눈치인지라 자리를 내주었는데, 곧잘 했다.
우리는 조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후쿠오카에서 1년간 경제학을 공부했고,
고시엔 선수 같은 까까머리에서 드러나듯 야구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한신 팬)
나는 그에게 피아노를 어떻게 연습하냐고 물었고, 그는 (역시 독학이었는데)
1) 좋아하는 노래의 악보를 구하고 계속 친다.
2) 막히면 왼손, 오른손 따로 친다.
3) 그래도 막히면 아는 선생님에게 물어본다.
4) 그래도 막히면 될 때까지 친다. (5시간 정도?)
하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5시간 정도.
밴드를 할 때 만났던 밴드 친구들의 연주 실력을 보면서 항상 감탄을 했고,
나(혹은 우리)의 미숙함이야말로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하나의 경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인 차이, 의도된 불안함과 한계에서 새어 나오는 허접함은 가릴 수가 없었다.
나의 밴드 친구들은 참 연습을 많이 했다. 하루종일(비유가 아니다) 합주를 했다는 성건이나
이른 저녁에 찾아와 새벽 늦게까지 동생과 같은 노래를 불러대던 지완이나
합숙을 하듯 대공분실 지하 합주실에 처박혀 좌절하듯 믹서 앞에 앉아 있던 404 여러분,
평소 인간 됨됨이 만큼이나 성실하고 꾸준하게 연습을 하던 대윤이나
그야말로 오지게 했다. 그럼 반문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왜 치열하지 못한가?
이건 참 의문이다. 나는 지금껏 나름 열심히 나를 내몰고, 성실하게 그 몰아붙임에 순순히 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알고 보면 '정말 죽도록' 하는 아이들과 비교하면 그냥 그런 수준인 것이다.
그 '죽도록'의 차이가 결국 그때 우리 음악의 차이를 불러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건 밴드 해체 이후의 일.
그런데 나의 집중력은 좀 짧은 편이라(또 집중하는 동안의 버프도 뭔가 강력한 것도 아닌 것이)
5시간이고 온종일 하나에 매달리는 성격도 못 되고, '이거다 싶은 것'은 되게끔 노력하는 그런 독함도 없으니
그냥 지금처럼 마이 페이스를 지키며 유유자적 산보하듯 살아야겠다,
고 생각이 든 건 오늘 오전 화장실의 햇빛을 바라보면서의 일.
성희 누나 만화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하고 싶다. 그 '울고 싶은' 지점에 대해서.
나는 입대를 앞두고, 태평양 홀을 꾸미면서, 슬펐다.
소파를 들여놓고, 브라운관을 뺀 텔레비전 속에 전구를 설치하며, 일주일 내내 새벽 늦게까지 혼자 공간을 꾸미면서
슬펐다. 정말이다. 내가 떠날 공간에, 그토록 사랑하는 공간에, 이제 나는 없고, 나 없을 그곳을, 그땐 없는 내가 꾸민다.
미친 거 아냐? (그런데 더 슬픈 건, 내가 간 이후로 아예 그 공간이 사라졌다는 거) 슬픈 인테리어였다.
그런데 감정을 거두고 생각해보면 인테리어가 슬플 수는 없다. 슬픈 컨셉으로 인테리어를 꾸미는 것도 어불성설 같다.
가능한 게 있다면,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의 슬픔과, 인테리어를 보는 사람,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슬픔일 게다.
이는 인테리어에 내 정서를 투사하는 것이고, 객체에 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해당 사물과 순간을 자의적으로 전용하는 것이다.
이를 성희 누나 만화에 대입시키면, 누나 만화에 나오는 많은 장면과 풍경은 덤덤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산보하는 기계가 감정 없이 기록한 스냅 사진처럼. 그런데 그것은 슬프다. 그 안에서 나는 울고 싶다.
그 울고 싶음은 그 장면과 풍경에 내가 슬픔과 무기력과 한없는 소외, 혼자 있고 싶은 지방근성과 세계와 연애하고 싶은
교류성 속의 혼란을 투사시킨 결과이다. 성희 누나의 만화는 일종의 인덱스처럼 해당 장면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에서
새겨진 '울고 싶은 순간'을 소환한다. 누나의 맥락과 나의 맥락이 딱 부합되진 않더라도 그 갭을 매우는 건
그 슬픔의 어마어마하게 강렬한 감정적 에너지(와 소진 이후의 여운)일 것이다.
나는 요즘 불안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싫은 분위기와 자리가 많이 마련되고
그것에 익숙하지 않아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눈물이 터질 것만 같다.
(내 나약한 기질을 군 생활 내내 연기적인 오지랖과 사교성으로 가렸건만 지금은 그것이 피곤하다.
말년이라고 일을 기피하는 것도, 또 그것에 자격지심과 내 스스로에 환멸을 느끼는 것도,
성희 누나처럼 표현하자면'미안하기도 지겹다')
상정이 형을 보면서 누차 드는 생각. 결국 이해받지 못할 타자들의 세계에서 유일한 구원은 짝이다 :
연애, 결혼, 오랫동안 곁에 머물며 각자의 역사를 공유하며 고통의 기억을 헤쳐나갈 수 있는 관계라면 무엇이든.
석관동 카페 그램 앞, 카센터 앞 지저분한 도로를 걸어가는 성희 누나가 말하는 것처럼 나도,
혼자이고 싶지 않아.
일본어 강의를 들으면서 "不思議な力, 후시기나료쿠",
요상한 힘이란 단어가 등장했는데 정말 요상하게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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