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문득 박지우야말로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예술가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깨달음의 재미있는 점은 '박지우야말로'에 있다. (이말인즉, 그 전까지 그는 내게 있어 '예술가'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니까) 나는 그를 2004년 고교에서 영화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고, 음악에 푹 빠져 있던 2007년 이후에는
줄곧 함께 합주를 해왔다. 제대 이후에는 공동 작업이 뜸해졌지만 그래도 학업 중에 공연을 하고, 글을 써온 걸로 안다.
졸업 후에 그는 애니메이션과 게임 제작회사 등지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우주적>이란 어쿠스틱 그룹으로 음악을 만들던 2007년 무렵의 그는 정말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영혼 없이 양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루에 한 곡은 꼭 쓴다', '일주일에 시 세 편은 꼭 쓴다'는 식으로 쉴 새 없이
결과물을 뽑아냈다. (자기만의 창작 계획표가 있을 수도 있다) 예술, 문화 분야에 관심 있는 대학생 치고 20대 시절에
밴드 안 한 사람 없을 정도로 '반짝 뮤지션', '나도 뮤지션'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다가 졸업과 함께 홀연히 소멸하는
요즘에도 그는 계속 창작을 하고 있다. (물론 시나리오 작가란 본인의 직업을 창작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가 '본격적인' 예술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창작보다 현실과 생업에 대한 고민을 우선시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판단이 애초에 잘못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고, 비슷한 시기에 박지우는 그간 써두었던 시들을
모아 시집 <잡념의 시간>을 발간했다.
'기계적으로' 창작하는 박지우는 동시에 끔찍하게 내향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이다. 내가 아는, 내가 관찰한 박지우는
새로운 관계를 굉장히 부담스러워 하고, 쉽사리 참여하기를 주저하는데다가, 소극적으로나마 손길을 내밀면서도
되돌아온 반응에 민감하게 상처를 받았다. (물론 내가 그의 모든 관계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가 '신중하게' 선택한 몇몇 소수 관계를 제외하면 나머지 관계에선 철저하게 공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거리를 두었다.
이러한 폐쇄성으로 '예술가' 박지우는 당대의 예술 씬에서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창작 동료들도 극도로 제한되고,
자신의 창작물을 비교할 대상도, 피드백과 지지를 받은 대상도 별로 없고, 작품 발표도 소극적이거나 애당초 시도조차 안 한다.
그 결과 박지우의 시와 노래는 시집 제목처럼 거울을 마주보고 혼자 중얼거리는 '잡념의 시간'의 '기계적인' 기록물 같다.
시집 <잡념의 시간>은 그 결과물의 소산이자 폐쇄적인 망상가 박지우의 의례적인 행보다. 적은 수량이나마 출판을 했고,
인터넷에서 판매까지 이뤄지고 있으며, 지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으니, 전과 비교하면 굉장한 변화다!
그와는 별개로 그의 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선 위와 같은 맥락을 이해하고, 박지우의 골방으로 들어가며 '정중히'
행동해야 한다. <잡념의 시간>은 그의 잡념이 공간화된 일종의 자기세계, 자기영역이다.
<잡념의 시간>, 혹은 박지우 시(와 노래)의 근본적인 주제는 '나'라는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나'와
그런 '나'와 대립하는, '나'를 '나'로서 지탱할 수 없게 하는 외부 조건과의 투쟁, 알력다툼에서 불거진 '잡념'이다.
"나는 4평의 어느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 나는 혼자다. / 너도 그랬나? / 그건 알 수 없다.
왜냐면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 없는가? (뇌까리기 3 부분 인용)"에서처럼
박지우의 시에선 '나'와 '너'의 구분이 명징하고, 이 둘의 대립은 전제조건처럼 태생적이고 숙명처럼 지난하다.
나는 널 모르고, 너도 날 몰라. 이것이 타자와 나의 기본전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내가 '나'를 명백히 아는 것,
'나'가 '나'임을 증명하고 유지하는 것이리라) 박지우는 여기서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 없는가" 하고 묻는다.
여기서 타자는 불가해한 제3의 존재(에일리언처럼 적대적인 생명체일 수도 있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회 구성원일 수도 있다)
이면서 닿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대상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발달사를 논하며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지방근성과
세계로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교류성의 개념과 그 둘 간의 긴장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이는 사회구성체의 인간으로서 갖는
태생적 조건이기도 하다. 박지우의 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긴장(과 본인 스스로 느끼고 있을 두 모순되는 힘)은
그로 하여금 어떤 태도를 고수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게 한다. "우주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은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다. /
사람은 별이 되어 간다. / 하지만 별빛보다 불빛을 더 가까이 하는 이유는 뭘까? / 그건 별빛은 너무 멀기 때문이 아닐까 (…)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뇌까리기 3, 부분 인용)" 그는 타자와 세계의 "절실한 그 무언가"를 갈망하면서도
"절대 타인의 영역에 침범한다든가 간섭하면 안 된다(뇌까리기 6, 부분 인용)"고 못을 받는다. 이쯤 되면 블러(Blur)의
<Coffee and TV>에서 "사회생활은 내게 너무 힘들"다고 노래를 부르는 그레이험 콕슨(소년과 어른이 공존하는)이
떠오르지 않는가? 확실히 박지우에게도 사회생활은 지방근성과 교류성의 무수한 반복과 번복, 후회와 채근의 연속이다.
"'나는 사슬을 끊고 싶다' / A가 말한다. / "그 영화 어때요?" / 사실 별반 중요하지 않다. / 팽개쳐져도 괜찮다. /
5분, 10분, 1시간 그리곤 답이 온다. / "그냥 그래요." / 이어가야 한다. / 이어감에 대한 강박. / 하지만 다시 침묵.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든 건 제자리를 지킨다. (뇌까리기 6, 부분 인용)" 사회생활 속에서 구성원들과의 각축을 이루는
갖가지 방법론은 결국 그에게 어떤 회의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나는 네가 아니고 나이기 때문이다. (뇌까리기 6, 부분 인용)"
어떻게 보면 편리한 합리화 같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사회생활의 필연적인 파국은 방법론의 오류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이유,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인 소통 불능에 있다. 그렇다면 우린 애써 사회생활의 피로를 감내하며 인정투쟁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호감을 살 이유도 없어진다. 그냥 '나'를 닮은 '너'에게 존재하는 '나'의 어떤 부분을 취사선택하여 멋대로 해석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유아론에 가까운 이런 태도,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체념하며 자아에 침잠하려는 태도에 대해 박지우는
의구심을 갖는다. "보이는 대로 이해하라는 건 상대방에게 꽤 잔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 그러므로 난 지금까지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한 것인가? (…) 우린 자기 자신이 너무 개인적임을 간과하고 있다. (…) 이것이 나의 최대 타협점이다. (뇌까리기 7,
부분 인용)" 박지우의 시(와 노래)는 세상과 소통하려는 그의 "최대 타협점"이 분명하다. 그러나 거울과 나눈 대화를 일방적으로
던져주고 "보이는 대로 이해하라"는 건 적은 단서만을 제공하고 사건을 해결해보라는 짓궂은 추리소설 작가의 심통 같기도 하다.
타자와의 반응과 대꾸 없는 이 자기애적인 교류의 기록은 "허공의 메아리"일 따름이고, 그는 "자꾸 좌절한다".
박지우는 이 비극적인 결말만이 주어진 비극적인 게임의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어 조울을 넘나든다. 그 결과 "숨이 차오를 때쯤 /
겨우 그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그대. (나무에 올라, 부분 인용)"에 환호하다가 이내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필요하지 않게 돼간다. (뇌까리기 8, 부분 인용)"며 기대를 접는다.
그리고 기대에 이은 실망과 좌절은 자기혐오로 되돌아온다. "잘못의 근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 그게 참 슬프긴 하지만 현실 /
생각이 자꾸 자기 탓으로 흘러간다. (뇌까리기 8, 부분 인용)"
2013년, 나는 그와 함께 <Second Coming>이란 작은 합동공연을 기획한 바 있다. 그것은 2007년 <우주적> 이후로 갖는 우리의
첫 번째 공연이었는데, 그의 노래를 5년여 만에 다시 듣고 난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노래는 정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냉동 수면된 우주인처럼 시간의 영향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굳게 흔들리지 않는 그의 '곤조'를 발견했다.
공연이란 특성상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나'와 그걸 듣는 관객의 '반응'이 보이지 않는 화학작용을 만드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준비한 노래-자기를 불렀다. 나는 그 힘을 뒤늦게 알았다. 화려한 연주와 소란스러운 호응과 비평에 무뎌졌던
'작은 노래'의 '작은 가치'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예술 지형에선 자기 PR을 넘어 자신의 재능을 빠르고 전략적으로 자본화하는 과정(이는 이미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보편적인 덕목으로 자리잡았는데, 일본의 팝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의 사례를 상기해보자)을 모두가 체득해야 한다. 거기에
누락되면 예술의 근본적인 지탱 요소인 관심과 인정으로부터 제외된다. 적극적인 교류 대신 폐새적인 자기를 유지하고 일관성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 박지우는 일견 그러한 흐름에 도태된 것 같지만 누가 알겠는가. 문화 자본의 거품이 사그라지고 자신의 역사와
현재의 삶과 창작을 일치하는 새로운 예술의 관심이 다시금 대두될지. 메이저 출판사와 신춘문예 등단이란 정통 주류 노선이 아닌
부크크란 독립 출판 매체를 거쳐 자신의 시집을 지인들과 향유하는 그의 선택 역시 자신의 행동반경 내의 세계를 구성하고
이해하는데 공력을 집중하는 '1마일족'의 마이크로 정치성과 부합한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오늘날 예술이 어떻게 상품이 되고, 그 상품이 예술을 집어삼키는지, 작품 활동과 작품이 소비되는 과정을
통해(자신을 그야말로 산화하며)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인정'이다. 문화 자본화한 오늘날 예술 '시장'은 작품과
작가에서 주어지는 인정을 수량화하여 값어치를 매기고, 거기에 따라 작품의 고과를 판단한다. 이것은 비단 뉴욕 화상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마트한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에 깊이 연루된 사회 구성원 일상 전반에 걸쳐 자행되고 있는 현상이 되었다.
(디지털 문화에서 형성된 파생현실 '시뮬라크르'에 기반한 창작이 다시 일상으로 침투하고, 다시 시뮬라크르를 낳는 지점에 대해선
다른 지면에서 서술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다) 이 눈알 돌아가는 게임 속에서 '나'와 타자의 소통 불가능성을 고민하는 박지우의
소박하고 퇴행적인 시는 역설적으로 시의성을 갖춘다. (상업화를 거부하며 완고하고 구차하게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로버트 크럼이나 자신만의 엄격한 기준으로 촬영한 사진을 죽는 순간까지 발표하지 않은 비비안 마이어가
다시금 조망 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이는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새로운 문화 분석과 관계맺은 준거 틀이 요구되고
있는 오늘날, 다시 돌아가 확인해야 할 출발점일 지도 모른다. "결국엔 본질은 자신으로 돌아간다. (…) 중요한 것은 책임과 무게와
한계를 느끼고 발화하는 것. / 산화가 아닌 발화. (뇌까리기 10, 부분 인용)" 그가 정녕 자기 침잠 끝에 잠념으로 용해되는,
혹은 무라카미 다카시처럼 상품과 자본의 파생현실로 기꺼이 산화(散花)되는 게 아닌, 상대적이고 불가해한 타자들의 세계 속에서
유일무이한 '나'의 유니크함을 조그맣지만 지치게 않게, 어떻게, 발화(發話)해나갈지 지(지하며)켜보자.
LONELY SONG, 박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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