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10월 17일

2014. 12. 14. 18:43 from blur girl's diary
일전에 당번병과 함께 여단장이 기르는 개에게
먹이를 주러 간 적이 있었다.
개는 사람을 보자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 정욕의 화신이
된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고, 친구는 이를 재미삼아 놀려댔다.
그런데 그 순간 개의 목줄이 훌렁 빠지면서 개가 탈출,
자유의 몸이 되자 개는 후다닥 내뺐고...
나와 친구는 해가 질 때까지 개를 열심히 쫓아다녀야 했다.
(결국 한참 우리를 끌고 돌아다니던 개가 질렸는지
제 발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순간 든 생각인데, 개가 싫다.
대상을 향해 사랑을 맹목적으로 갈구하면서
설령 그것이 배신된다 하더라도 성인처럼, 혹은 유전자기계처럼
배신의 기억을 망각한 채 다시금 사랑을 구걸하는 개의 습성이
처음엔 가여웠는데, 지금은 싫다.

때문에 나는 개 같은 사람도 싫어졌다.
개 같은 사람은 D.H.로렌스의 소설 속 대사에서 잘 묘사된다.
"당신은 사랑을 구걸하는 비렁뱅이다. 당신은 사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해.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당신은 무엇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으로 그것을 메우려는 것이다"
감정이란 나란 개별적 주체와 타자와의 상호관계에서 나온다.
때문에 감정에 있어 관계의 중요성은 절대적이다.
가령 "단일한 의식"으로만, 자연과 사람, 어떠한 외부 환경과의
관계맺음을 무시하고 하나의 주체로만 세상을 인식한다면
거기에는 감정이 있을 수 없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나
이명박 정부의 개발논리로 인한 용산 철거민 참사 등.

사실 우리가 타자를 인식해온 과정은 곧 억압의 거대서사를
형성해온 역사와 다름없다. 가장 근본적인 타자와의 갈등 중
하나가 바로 남녀 문제일 것이다.
(페미니즘 입장으로 보면) 남성이 여자를 어떻게 환원하든,
혐오의 신화든, 모성의 신화든, 쾌락지상주의의 신화든,
종교적 찬양의 신화든, 해방의 신화든 결국 여성이란 주체는
남성이란 주체의 존재로 말미암아 완성된다는 환원 방식에서
문제가 있다고 보부아르는 지적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참된 행복은 고독이 아닌 연대에서 발생한다.
타인과의 유대감과 상호관계, 친밀한 소속감은 더없는 즐거움이고
행복이다. 그럼에도 이를 강제하는 사회 억압 이데올로기는
이미 충분히 인류를 도탄에 빠트리게 하기 충분했다.
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하면서 타인과의 접촉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우린 일차적으로 자립하고, 독립하고, 여하간 홀로서야 한다.

사랑을 주는 대상이 존재해야만 자신의 존재 이유가 바로 서는
개가 싫다. 얼마나 비굴한 삶인가?
(이러한 지점은 <빨간 풍선>(김수박 저)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잘 드러나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반면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이름 없는
고양이는 건방지게 혼자 유유자적 살다 결국 술독에 빠져 죽는다.

자신의 머리를 때려쳐도, 골이 부서져도 피를 흘리며
낑낑거리며 다시 오는 개와
다가서면 멀어지는 구름 같은 고양이와
짜파게티 먹고 배가 부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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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