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출근을 하면, 나의 처부장은 항상 바쁘다.

 얼마 전 새로 깎은 머리 너머 원형 탈모의 조짐이 빛나고, 아아,

 하지만 난 도와줄 수 없다. (여러 모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새로 도착한 드립커피 틀에 새 원두 커피를 조금 덜어내 뜨거운 물을 붓는 것.

 전까지 인스턴트를, 혀가 아릿아릿한 인스턴트 블랙 커피를 먹어 왔지만

 휴가 이후로 새로 도전하는 것. 코나 커피라고 하와이산이라고 한다.

 그런데 원두를 너무 아껴선지, 물을 확 부어선지 너무 밍밍하다.

 이런 쪽에 조예가 깊은 윤모 대위에게 문의하자

 "팔팔 끓는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렸어야지!" 하고 역정을 내더니

 원두 향을 맡아보곤 "어, 이건 왜 이리 향이 없냐" 하고 당황해한다.

 이씨, 지금 방금 뜯은 건데 향이 다 날아갈 리도 없고. 내가 더 황당하다.

 내일은 조금 양을 더 늘여 커피를 내리기로 다짐. 아깝지만

 머리가 벗겨져가며 이곳저곳 욕 먹으며 일하는 나의 처부장에게 커피를 조금 나누어주었다.

 

 말도 안 되는 포토샵 작업을 오전에 어느 정도 하다가

 그간 밀린 신문 스크랩을 계속 했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문화, 사회적 경제, 아시아, 이상한 인간들.

 후쿠시마와 탈핵 문제 기사도 일관성 있게 모으고 있다. 

 점심을 먹고 일주일 정도 쌓인 신문들을 오리기 시작했는데, 두어 시간이 소요되었다.

 음, 만약 내가 이 일을 그만 둬도, 그러니까 이렇게 날로 먹으며 일하는 이 직업을 그만 둬도

 신문 스크랩을 계속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

 신문을 정독하고, 관심 있는 기사를 스크랩한다는 건 참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드는 일이다.

 기사들을 시작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는다면, 아무리 고속으로 읽어도 1시간 가량이 걸리며

 정말 좋은 기사가 많아 대부분의 신문을 오려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1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이뿐이랴. 스크랩을 담을 파일과 속지 마련하는 것도, 공간도 문제다.

 아날로그는 이게 문제라니까. 물성. 하지만 물성 없이 어떤 가치도 발생하지 않는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 무언가를 기록하며 기억을 연장하는 것.

 망각에 저항하는 것과 박제화시켜 그로테스크하게 간직하려는 변태적 취미와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을 봄날 점심 바람 속에서 한가로이 떠올리다.

 아무튼, 요새 나의 일상 패턴은 이러하고 이후로도 계속 간직하고 싶은.

 

 

추가적으로,

한겨레 신문에서 본 영국의 천재 피아니스트 벤자민 그로브너의 연습 클립.

22일 첫 내한 공연이 있다고 한다. 동영상 속의 그로브너는, 2012년에 찍힌 것 같으니 19살 땐가?

아무튼 지금은 23살. 피아노 연습으로 지칠 때 하는 취미는 '실내악, 협주곡 등의 다양한 연주'란다.

진짜 맙소사다. 그래도 그는 <위플래쉬>의 플랫쳐 영감처럼 귀뺨 맞아가며, 호모 소리 들어가며

피아노를 치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일본 현대 순정만화를 읽는 즐거움은 평생 못 누리겠지만.

그나저나 동영상을 찍는 게 만약 그의 어머니라면, 얼마나 자식이 대견스러운지 계속 실실 웃는다.

그 모습이 짠하여 오늘 일기에 박제시키고자 함. (난 기억의 람세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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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