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예

2015. 4. 18. 23:01 from blur girl's diary

 

 그놈의 사주팔자.

 도저히 알 수 없는 나름의 법칙으로 요리조리 짜맞춘 명징한 단어로 나란 인간을 규정한다.

 이로서 나는 이것저것 일은 (화끈하게!) 잘 벌이는데, 수습은 못 하는 칠칠맞은 녀석이 된다.

 (하지만 이 또한 핑계다. 사실 사주팔자 이전에 나는 이미 숱하게 비슷한 지적을 주변에서 많이 들어왔다)

 

 여하간, 나는 한 달 전부터 독서토론 동아리 부원들에게 원예를 해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사무실 뒤편에 당근이든 방울 토마토 따위를 길러보자고. (카와치 하루카의 만화 영향이 컸다)

 그런데 이 주변엔 종묘상이 없었고(적어도 인터넷에 등록된 업체는 없었다. 당연하지...),

 5일장에 시간 맞춰 갈 경황도 당연히 없었다. 내 의욕마저 피식피식 꺼진 것이 사실.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휴가에서 돌아온 부원이 용케 상추와 당근 씨앗을 사왔다.

 이 병장! 어서 씨를 뿌리시오! 명령을 하는 것이다!

 나는 조금 아연실색해 뒷걸음치다 (원예에 의외로 매달리는 몇몇 부원들의) 패기에 눌려

 결국 하얀 스티로폼 빠께스를 구해 일주일 전에 행정보급관이 비료를 친 흙을 훔쳐왔다.

 그리고 사무실 뒤편, 양지 바른 곳에 빠께스 세 개를 나란히 좋고 손으로 작은 이랑을 일궈

 씨앗을 촘촘히 뿌렸다. 흙은 아주 부드러웠고, 마치 찰흙 장난을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에게 이를 보고하자 1. 씨앗을 너무 깊게 심지 말 것. (싹이 나오기 힘들다)

 2. 물을 너무 자주 주지 말 것, 등의 조언을 얻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흐지부지 부실한 책임감의 내게 원예를 다독여준 동료들이 있어

 무지 행복했다! 

 

 덧붙여.

 그리고 오늘부터 드디어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독서가 시작된다.

 이건 정말 내게 대단한 사건인데, 그의 책은 박력이 대단하여 뭔가 압도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책을 읽는다는 경험 역시 무척 설레고 기대되는 바.

 

 어제 완독한 이소마에의 <상실과 노스텔지어>는 무척 사려 깊고 예민하게

 미처 검토하지 않은 사유의 지평을 확장시키는 작업인 듯하나 내 지식의 함량 부족으로

 온전히 수용하진 못했다. 더 공부하다 보면 더 아름답게 느껴지겠지.

 

'blur girl's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카야 이즈미  (0) 2015.04.24
혹성탈출의 시저처럼  (0) 2015.04.20
잘 동기화된 나의 게슈탈트 하나  (0) 2015.04.17
마인드 컨트롤!  (2) 2015.04.09
꽃구경  (0) 2015.04.04
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