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토론 동아리 부원들과 밖에서 배드민턴을 쳤다.
외부 환경에 취약한 이 스포쓰를 내가 다시 임한 건 그야말로 2년, 3년만?
느타리 버섯 같다고 놀리던 부원에게도 처참히 패배. 감자칩을 사주는 굴욕을 맛봤다.
오후에는 옥외 베란다 소파에 누워 카메라 옵스큐라를 들으며 보드리야르의 책을 읽었다.
이 경험은 가히 각별했는데, 왜냐하면 봄날에 꼭 듣겠노라고 겨우 내내 참던 카메라 옵스큐라의 노래가
떨리게 아름다웠으되 보드리야르의 시니컬함은 <시뮬라시옹>에 이르러 거의 만개하여
면도날의 서늘한 감촉을 떠나 세상과 유리됨에 앞서 느끼는 공포마저 체감할 수 있었다.
시뮬라크르에 의해 진실이고 뭐고 모든 것이 은폐되고, 그 시나리오에 포획된 뭉개진 대중의 예고,
실재(가 만약 존재한다면)를 앞선 가상의 이미지. (오늘날 우리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이 우리를 본다!) 이 책의 무서운 점은 세상의 비밀에 (순진무구하게) 내팽개쳐져
(정작 보드리야르는 조금도 책임질 생각 없는) 항구적인 파국의 전경을 무력하게 목도하면서
그와 동시에 '이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판단하기 위해 짱구를 쉴 새 없이 굴리지만 그에 관한 결론이
나올 턱이 없는 문제라는 것, 그것이 시뮬라시옹의 논리가 전적으로 지배하는 오늘날 세계의 문제라는 점.
그와는 별개로 카메라 옵스큐라의 <마이 마들린 커리어>는 지독하게 아름다운 앨범이다.
기본적으로 60년대 팝 넘버들이 꿈에 휘말려(리버브-슈게이징) 요지경(옵스큐레이팅)으로 펼쳐진다.
이 앨범을 장악하는 것은 전면에 드러난 실내악 편곡이 아니라 어느 곡이고 빠짐없이 자신의 곤조대로
기타를 연주하는 전자기타 제1주자의 연주에 있다. 유심히 살펴보면 이 연주자의 고집은 앨범의
내적 일관성을 해치기까지 하고 있는데, 편곡에 맞춰 능수능란하게 치고 빠지는 피아노의 센스와는 달리
우직하게 자신의 연주를 노래에 안착시키는 능력이 가히 인상적이다.
오늘 두 번 이상 들은 노래는 Swans, My Maudlin Career, Other Towns & Cities.
총합된 음들이 바람처럼 몸을 마구 파고들어 떨림이 멈추지 않는 경험.
미사 시간. 나름 준비를 많이 했음에도 실수 연발.
처음에는 '참 마음은 대단하군. 아무리 몸에 익어도 마음이 꺾이니까 움직이질 않으니까 말이야' 하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첫째, 나는 노래를 잘 모른다. 이 말인즉, 객관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악보를 준수하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다보니 악보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이 안 되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나의 흥을 모른다. 내 연주는 비약과 생략, 밀고 당기고, 아무튼 그런 특유의 그루브가 있는데
이는 사실 성가에서는 불필요한 기교일 지 모른다. 아무튼 모두 정박의 찬송가를 부르는데 혼자 재즈를 치고 있는 상황.
미사가 끝나고 정리하는 군종병들에게 '너희들이 노래를 잘 리드하지 않으니까 노래와 연주가 따로 노는 거 아냐!' 하고
괜히 성질을 냈더니 우습게도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밴드하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허허, 참.
저녁 식사 후엔 오랜만에 음악들을 찾아 들었다. (블러 신보, 월요일 발매!)
전자양의 공연 영상도 보았다. 춘천 어디매에서 한 공연인데, 와우.
오늘 주의 깊게 들은 건 60년대 서프 뮤직. 한 장르가 발생하고 소비되는 측면이 궁금하다.
(가령 슈게이징, 로컬 인디 팝을 소비하는 이 거대자본-문화제국주의에 반하는 악동들은 무슨 발상인 걸까?)
생활관에선 아이들이 점호 끝나길 기다리며 값 비싼 시계 얘기를 했고,
싫은 건 싫은 거지만
나의 요즘 나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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