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아사히 신문(2015년 7월 13일자)의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기사 원문)

 

* * *

 

패션의 숨겨진 곳을 탐구하는 야마가타 요시카즈

 

 

山縣良和, 1980년 1월 15일생

 

"패션에 관심을 갖고 복장을 상상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실 본질적인 것은 복장의 '물성(モノ)'이 아니라

'사건성(コト)'입니다. 즉 패션이란 지금, 여기(事象)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것에서 늘 변화하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혼처럼 말입니다."

 

숍에 진열되는 옷은 별로 만들지 않고, 패션쇼에선 서사(物語性)를 중시한다.

예를 들면 옷감을 말아 "신"과 거대한 갈퀴 의상을 두른 "칠복신(七服神)"을 발표하는 식의.

일반적인 패션 브랜드의 존재 양식이란 남다른 전위적인 크리에이션을 통해 예술계에서도 주목을 받는 것이다.

2013년 10월에 "MIKIO SAKABE"의 디자이너 미키오 사카베(坂部三樹郎)와 함께 프로듀싱을 맡은

전람회 "절명전 : 패션의 비경"에서는 살아있는 인간 모델이 마네킹으로 변화하는 등,

삶에서 죽음으로, 삶의 내용을 뒤바꾸며 패션의 윤회전생을 표현했다.

 

"계절이 바뀌듯 매우 자연스럽게 변화해 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었어요.

12월에는 같은 전시의 특별 기획으로 국립신미술관에서 실험적인 패션쇼를 하러 갑니다.

하나의 전시가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는 것 또한 윤회전생의 이미지와 통하는 것 같아요."

 

패션에 흥미를 안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자기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던 것이

"쩌는(格好いい) 옷을 입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타고난 탐구심이 더해져 패션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었고,

알면 알수록 깊이에 매혹되면서 런던의 명문 센트럴 세인트 마틴 미술대학의 패션 디자인 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2007년에 자신의 브랜드를 설립했고, 현재는 패션 디자인 교실 "여기의 학교(ここのがっこう)"를 주재하고 있다.

 

"상업적인 면만으로 패션은 천박하다고 말하는 건 싫어요. 인간이 옷을 입는 행위의 리얼리티와 사회적 배경 등,

소비활동과 연결되기 이전의 근원적인 부분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양쪽을 알고 있는 세대예요. 중간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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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2015년 7월 4일자 아사히 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기사 본문)

 

* * * 

 

 (도쿄 올림픽 이야기) 목욕탕 전성기, 10엔에 하아~ 극락극락.

 

 전시 중, 도쿄 대공습으로 격감했던 목욕탕은 전쟁이 끝나자 급격히 늘어나 1964년 도쿄 올림픽 무렵에 전성기를 맞았다.

총무소[각주:1]의 집계에 따르면 당시 자택에 욕실을 갖춘 가정은 42.2%(68년). 목욕탕은 서민에게 생활의 일부였다.

 

 이 휴식의 장소는 연료비와 인건비 인상을 위한 파업으로 인해 폐쇄된 적도 있었다.

올림픽 전년 8월 31일자 아사히 신문은 "조합이 요금 인상을 신청했지만 정부와 도가 10개월이나 방관하면서

조합원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라고 업자 측의 말을 전하고 있다.

 

 성인 요금 19엔에서 23엔으로의 인상. 그 가운데 파업도 참여하지 않고 10엔으로 영업을 계속하던 도쿄도 고토구의

"스나마치 목욕탕"은 크게 번성했다. 매일 아침 리어카를 끌고 가까운 화물역을 지나며 대합실을 청소하고

석탄 찌꺼기와 톱밥을 얻어가는 등 궁리를 이어나간 것.

 

 "지금 목욕탕 한 곳이 폐업할 때마다 제 작품도 사라져 갑니다. 씁쓸해요"

일본에 몇 안 되는 목욕탕 화가 나카지마 모리오 씨(70)는 한숨을 쉬었다.

커다란 탕에 몸을 담그고 올려보는 웅장한 후지산.

 

 후쿠시마현 이타테 마을에서 18세에 상경하여 처음 본 후지산 그림에 마음을 빼앗겨 공장 노동자에서 화가로 전향했다.

"목욕탕 문화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성인 460엔이 된 도심의 목욕탕의 수는 올해 5월 말까지 644곳. 

가정용 욕조가 보급되고 경영난도 겹쳐 전성기의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스나마치 목욕탕과 함께 스나마치 긴자 상가에서 "사쿠라탕"을 운영하던 또래 연배의 업자는 말했다.

"손님들이 계속 해달라고 말해서 힘을 내고 있고 있습니다만 더는 한계입니다"

6월 15일, 아쉬워하며 폐업하였다.

 

  1. 総務省, 행정관리‧지방자치‧방송‧우정사업 등을 관장하는 중앙 행정 기관. 「総務大臣そうむだいじん」을 장(長)으로 한다. 2001년 総務庁そうむちょう ‧郵政省ゆうせいしょう ‧自治省じちしょう 등을 고쳐 설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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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결성, 90년 데뷔한 스챠다라파.

엄청 레트로하다. 짱 멋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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かせきさいだぁ

2015. 6. 21. 23:13 from blur girl's diary

 

 일요일이었던 오늘, 키린지의 <오후의 파노라마>를 번역해볼까 했는데

 오늘 오후는 유달리 끈기가 없었고, 또 가사도 어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유튜브에 누군가가 번역한 동영상이 있어서 관뒀다.

 그러다 나름 레어한 이 노래를 누군가가 커버한 곡이 있어서 들어봤는데,

 그것이 카세키 사이다를 만난 계기가 되었다!

 

 

 

이것이 키린지의 <오후의 파노라마>를 커버한 곡.

원곡의 애수는 실종되고 말았지만 대놓고 명랑하게 부르는 느낌도 재미있다.

무엇보다 키린지 형제가 참 뿌듯해할 만한 편곡이라 큰 위화감이 없다.

(키린지 팬이라면 꼭 리믹스 앨범을 청취하길 바란다)

 

 

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싶어 다른 곡들을 찾아보았다.

아, 아주 멀쩡한 팝 밴드였군.

(참고로 위 뮤직비디오는 <키세키 사이다 MV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이라 한다)

그런데...

 

 

카세키 사이다는 꽤 오래 전부터 활동한 그룹인 듯했고,

90년대 당시엔 심지어 힙합 밴드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사이다 블루스>란 이 (고의적인 화질 열화로 인한) 끔찍한 픽셀의 뮤직 비디오를

유심히 보면 멤버들이 벤치에 앉아 해맑은 얼굴로 줄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있는데

슬라이드 기타 연주와 더불어 묘하게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90년대 정서 낙첨!)

 

 

심지어 라이브도 했다.

 

 

아무튼 스스한 여름밤 만난 괴밴드 카세키 사이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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パラダイス

 

広いソファーの上で2人

大事なことを話し合うのさ

君は背伸びで外を見つめて

ひどく大きな落とし物に気付く

Oh yeah

 

スゴイダンスを踊ってみせて

目の覚めるような スゴイダンスを

とりもどせないなくした何かを

みつけだすような スゴイダンスを

 

楽しいことなんて そんなにありゃしないから

 

街の空気は流れつづける

2人の街は遠い世界へ

赤いベンチも乾いた空も

“わかりました”と消えてゆくのさ

 

楽しいことさえも 忘れた僕だよ

 

Oh

パラダイス パラダイス

時の流れに押しつぶされて

パラダイス パラダイス

広いソファーの上で考え

パラダイス パラダイス

僕はこれからどこへ行くの

パラダイス パラダイス

気が付いたらもどれない

 

파라다이스

 

넓은 소파 위의 두 사람

중요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너는 기지개를 펴다 밖을 바라보고

엄청난 분실을 깨닫는다

 

놀라운 댄스를 보여줘

눈이 떠질 만한 놀라운 댄스를

회복할 수 없이 사라진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 만한 놀라운 댄스를

 

즐거운 일 같은 건 있을 리가 없다니

 

거리의 공기는 계속 흐르고 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먼 세계에

빨간 벤치도 마른 하늘도

“알겠습니다”도 사라져 간다

 

즐거운 일마저도 잊어버린 나야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

시간의 흐름 속에 망가져 버린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

넓은 소파 위에서의 생각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파라다이스 파라다이스

생각해도 돌아갈 수 없네

  

 일요일에 이런 걸 해보았다.

 자, 이제 달달 외웁시다!

 

 話(はな)し合(あ)う 서로 이야기하다, 말을 나누다

背伸(せの)び 발돋움, 기지개를 폄

見詰(みつ)める 응시하다, 뚫어지게 바라보다

落(お)とし物(もの) 분실물

ひどく大きな 몹시 큰

取(と)り戻(もど)す 되찾다, 회복하다

消(き)えてゆく 사라져 가다, 줄어든다

押(お)し潰(つぶ)す 눌러 찌그러뜨리다, 짓눌러 파괴하다, 억누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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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녀방앗간에 관한 기사를 읽은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기사 링크)

 한겨레 토요판은 가끔 보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삶의 방향을 뒤흔들만한.

 (인터넷 신문도 이런 감흥과 집중력을 유지케 할까. 비관적이다)

 

 지역 농산품 유통을 아이템 삼아 큰 수익과 나름의 지분을 빠르게 획득하고 있는

 밥집 '소녀방앗간'과 김가영 씨는 관념 자본주의 이후를 모색하는 중인 오늘날

 큰 주목을 받기에 적합한 요소들을 많이 갖추고 있다. 지역, 환경, 공동체, 청년 창업 등.

 (그러고 보니 한겨레엔 김가영 씨를 위시한 '정력적인' 젊은 여성에 관한 글들이 종종 실린다.

 또 얼마 전엔 '차라리 혁명을 준비하렴'이란 다분히 패색 짙은 정태인 씨의 칼럼에선

 이러한 젊은 여성의 파워, WE CAN DO IT, 를 예찬하고 있거나 마지막 대안 정도로 여기는 인상마저 느껴진다.

 상징 체계로 넘어간 관념 자본주의 체제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좌파들이 겨냥한 '새로운 주체'랄까.

 도시 재생, 마을 만들기는 확실히 새로운 주체를 모색할 수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의 새 경향과 준거 틀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지만, 단순한 전근대-근대로의 복귀, 퇴행이 아니라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소녀방앗간 등의 청년 창업, 언니네 텃밭 등의 지역-환경 사업, 일련의 사회적 기업과 협동조합 중심의 마을 공동체 재건이

 이명박 정부 말에 실업률 저하를 위해 막무가내로 몰아붙인 사회적 기업 및 협동조합 지원 드라이브에 

 미끄러 들어가지 않기 위해선 좌우간 나도 잘 모르지만 모종의 독보성이 있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또 다시

 그럴 듯한 연기나 사업 아이템으로, 결국 상징 체계 속의 또 다른 기호로 포획되어 관념 자본주의의 세계에 편입될 것이다.

 

 그럼에도 소녀방앗간의 성공은 많은 영감과 힘을 주기 충분한 사례일 것이다.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은 시골 할머니들의 텃세를 '뚫고', 그 다음 도시에 거래처를 '튼' 것.

 아, 정말 하면 되는구나. (졸라 어렵겠지만) 나는 뭐랄까, 이런 건 만화에나(시마 부장 같은) 등장하는 비지니스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그녀는 정말 '한' 것이다. 하면 되는 것이다. 검은띠 한국인보다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정말 멋들어지게 성공한 '마을' 충남 홍동의 사례는 가슴을 벅차게 한다. (기사 링크)

 이미 한국의 오늘날을 오래 전부터 겪고 있는 일본에서 마을 만들기, 커뮤니티 디자인은 새로운 분야가 아니다.

 도요타 직원 출신의 젊은이들이 섬에 들어가 지역 자본을 발굴하여 사업화시킨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링크)

 마주하는 사람과의 눈빛과 살의 접촉은 상징 체계의 기호 교환에 길들여져 매트릭스 세계에 지나치게 잘 동기화된 우리에게

 이제는 이씨 조선 왕조의 옛일처럼 향수 내지는 불가능한 역사가 되었다. 오늘날 역사는 가치를 상실했는데,

 유일불변의 진리가 항구적인 실종을 맞으며 공동의 역사는 동시에 종언을 고한 것이다. 과감히 말하자면 오늘날 역사와 진실을

 논하는 것은 치명적인 함열(싱크홀과 같은 내부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저마다의 역사와 진실을 갖고 있거나 차용한다. 여기서 진실은 결코 중첩되지 않는다. 세월호가 시사하는 사실은 이것이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상징 체계에서 근거로, 샘플처럼 몇 개 남겨 놓은 유산으로 작용할 따름이다.

 이것엔 큰 의미가 없다. 아니, 적어도 근대 이전 사물에 마법적인 위상을 부여하며 사유하던 때와 같은 의미는 없다.

 사물이 기능으로 전환되면서 내재된 의미는 상징 체계 속 기호로 넘어간다.

 그럼에도 뜨거운 직관의 세계, 눈빛과 접촉과 요동치는 삶의 흐름, 바람의 노래, 구름의 그림을 우리가 믿는다면, 갈망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감히 전망하건대, 추후의 난투는 뜨거운 직관의 세계와 차가운 상징 체계의 대립과 긴장.

 

 시골 할머니란 기호를 뚫고 소녀방앗간의 김가영 씨는 접촉을 했고, 욕을 먹어가며 도둑 농사를 지었으며,

 결국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실제적인 만남과 관계를 이룩했다. 소녀방앗간의 성공의 참된 의미는 여기에 있다.

 몇 년 전, 나는 지역 문화를 말하면서도 지역을 몰랐고, 청년 문화를 말하면서도 청년을 멀리 했다.

 지역성의 소멸과 청년이란 세대적 구분의 무용함을 간파해야 한다.

 각자에게 여전히 고향이 유효한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느 지역에서 느끼지 못한 고즈넉함을 준 수동의 침묵에

 구원 받는 기분이었다. 설령 고향이 아닐 지라도 우리가 전력투구할 만한 곳은 상징 체계가 아니라 어느 지역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할 것을 만들어야 한다. 할 일이 없더라도, 빗자루를 뺏어서라도 할 일을 만들어야 하고,

 욕을 먹어가며 축제를 벌여야 한다. 그런 '이례적인 상황'을 어떻게 교류하고 나누며 항구적인 순환으로 자리매김할지에

 대해선 좀 더 고민하기로 하며, 또 난 그녀처럼 세상을 이롭게 하진 못하더라도,

 사람을 믿고 싶고 아름다운 것을 더 보고 싶다.

 

Posted by 또복 :

 

 

イエスタデイをうたって

イエスタデイをうたって

イエスタデイをうたって

   

忘れられない言葉さ 悲しそうな瞳で

悲しそうな くちびるで

 

あの娘は僕に イエスタデイをうたってと

言った

忘れられない言葉さ 悲しそうな瞳で

悲しそうな くちびるで

 

昨日あの娘に 何があったか知らない

知りたくはないのさ どうでもいいことさ

 

歌ってあげよう 君に

ぼくはあの娘に イエスタデイをうたってあげた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잊을 수 없는 말

슬픈 눈동자로

슬픈 입술로

 

그 여자는 내게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말했다

잊을 수 없는 말

슬픈 눈동자로

슬픈 입술로

 

어제 그 여자에게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겠어

알고 싶지 않아 아무래도 좋아

 

노래하네 너에게

나는 그 여자에게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네

 

 

Posted by 또복 :

 

 

 홍콩의 만화가 "KONGKEE"가 블러의 신보 <The Magic Whip>에 "영향"을 받아 그린 만화가 공개되었다.

 블러 스토어에서 구입할 수 있다니 해외사이트 신용카드 결제가 되는 웃어른들은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링크)

 새 앨범을 구입한 사람은 알겠지만 앨범 커버부터 심히 당혹스러운 것이, 몽땅 한자로 표기되어 있어

 (심지어 한자 언어권이라 할 수 있는 한국에 살고 있는 나조차) 뭔가 "근본적으로" 배제되어 버린 듯한,

 그러니까 "타자"를 보는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이는 몹시 재미있는데, 그만큼 서구 문화-관점에 자기몰입을 하는

 문화적 식민계급의 오늘은 기존의 역사-문화를 백지화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웃나라 중국이 훨씬 낯설고 두렵게 느껴진다.

 어쩌면 평생 갈 일이 없는 지구 반대편 영국보다 훨씬 더 말이다!)

 흐린, 얼룩, 오점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닌 "Blur"는 "모호 模糊"로 번역되었으며, 

 마법의 채찍, 요술 채찍 "Magic Whip"은 "마편 魔鞭"으로 옮겨졌다.

 

 만화의 내용은 몹시 궁금하나 내용은 확인할 수 없는 서글픈 문화 식민지 하층(+군인)민 신세.

 그런데 우스운 것은 표지에 그려진 블러 멤버의 그림은 오늘날 40대 아저씨들인 모습과 심각한 괴리를 이룬다.

 게다가 그레이험 콕슨은 거의 히키코모리+왕따 느낌... 뭔가 클래식한 순정 만화와 초등학교 문방구에서 파는 딱지 종이 분위기.

  

 

 신보에 수록된 <Ong Ong>의 비디오 클립도 발표되었다. 중국에서 개조한 닌텐도 에뮬 (불법) 게임 같다.

 <옹옹>은 데이먼 알반이 합주하며 별 생각없이 흥얼거리며 붙인 제목이라 하는데(비슷한 사례로 "Beetlebum"이 있다)

 나중에 보니 Hongkong의 H와 K가 빠진 단어로 밝혀져 놀라움이 가중되었다는 소소한 에소피드가.

 그와는 별개로 <옹옹>은 블러의 전형적인 팝 넘버의 공식을 따라가면서도 그로부터(만화에 표현된 그때 그 시기) 훌쩍 지난

 오늘날의 블러 멤버들의 고단함과 연륜과 스잔함과 빛바랜 따뜻함과 달콤함이 갖가지 모순된 정서들과 충돌하는

 블러의 많은 노래들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괴기하게 느껴질 그런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인형옷 입는 블러 멤버들 어쩔 거야... (특히 바퀴벌레 옷 입은 콕슨...)

 이때의 당혹스러움의 원조를 보고 싶은 사람은 <파크라이프> 뮤직비디오도 보길 바란다.

 왜 알반은 다른 멤버들에겐 바퀴벌레와 파리 같은 흉칙한 걸 입히고 자기는 아이스크림처럼 귀엽고 멀쩡한 옷을 입었을까.

그게 궁금한 사람은 신보에 수록된 <Icecream Man>을 들어보면 되지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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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2015. 6. 7. 20:12 from blur girl's diary

 

 삶이 주말을 향한 레이싱인 사람에게

 연거푸 전화를 걸고, 연거푸 전화를 받지 않는

 주말은 서글프다.

 보다 연락과 수신이 어렵고 상상에 기대며

 맞닿음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주말이 외로운 이유 :

 입을 헤, 하니 벌리며 낮잠을 자도 이를 지적할 애인이 없기 때문임을

 결국 연애만이 구원이 될 것을

 시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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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재킹

2015. 6. 6. 23:24 from blur girl's diary

 

 자연이 기능적 사물로 외떨어진 모더니즘 이후로 직관의 세계는 빠르게 상징체계로 이동한다.

 독보적인 경험과 보편적인 역사와 특수한 고통은 빠르게 소멸한다. 남은 것은 상징과 기호,

 우리의 태도는 단 하나뿐이다. 무관심! 그것 외에 가능한 것은 없다. 현대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변화를 향한 모든 열망이 좌절되는 것은 저질 방법론도, 사회의 엄중함 탓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행위와 사건을 기호화시키는 상징체계에의 미끄러짐 때문이다.

 안에서부터의 폭발, 내파, 함열이라 할 만한 이 미끄러짐이 가능한 것은 상징체계의 견고함과

 상징체계에 익숙한 우리들의 단단한 지지와 공모 덕분이다. (영화와 삶의 관계를 떠올려보라)

 

 때문에 선과 악, 좌파와 우파의 경계는 이 함열 안에서 언제나 어긋난다.

 "악마화는 성공한 적이 없다" : 일베가 악마화가 될수록 사회의 정신위생은 보장되고,

 우리 내부의 일베는 은폐되고 암묵적인 승인을 이룬다. 투명한 악은 결국 사회 전체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극단적이고 독보적인 사건을 창출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놀랍게도 글쓰기와 대화에서 비롯된다.

 어디에도 가담되지 않은 나의 역사를 비로소 설명할 수 있을 때, 모두의 역사가 그렇게 발화될 때

 세상은 비로소 변하기 시작할 것이란 예언은 상징체계를 압도하는 독보성으로 실행될 것이다.

 다른 또 하나는 상징 교환 과정에서의 하이재킹, 공중 납치다.

 세계는 상징이 되었고, 우리는 상품을 구입하고 사물을 인식하고 세계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징을 교환하여 각 상징에 내포된 의미를 조합하며 각자의 진실을 짜맞추는 것이다 : 

 이 상징체계, 매트릭스라 할 만한 세계에 동기화가 잘 될수록 세계와 상징, 상징과 상징으로 이동하는 반응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이런 학습의 반복은 뉴런 연합체의 단단한 구성, 그야말로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의 진화라 할 만한,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낸다. 상징 교환에 익숙한 세계에서 실재는 단지 상징의 샘플, 근거로만 존재할 뿐이다.

 하이재킹은 이러한 교환 과정에서 사유자를 어디론가 납치해버린다. 예정된 이행로에서 엉뚱한 상징으로 빠지는 것이다.

 불현듯 끼어든 망상 내지는 자꾸 떠나지 않는 정신적 얼룩. 이것은 정신분석학에서 편집증이나 내사로 설명되고 있지만

 내적 일관성으로 꽉 들어찬 상징체계의 균질성에 균열을 주고 탈주의 가능성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하이재킹이 성공되면,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말해서도 안 된다.

 어디도 없을 그곳에 무사히 발이 닿는다면, 그 아름다움은 엽서로도 설명해선 안 되고, 과거를 말해서도 안 된다.

  

Come and Play in the Milky Night, Stereolab

 

지난 3일간의 스테레오랍 메모리얼 대축제를 찾아주신 모든 분께 감사 말씀 드립니다.

덕분에 가망성 없는 우리 역사를 가정할 수 있었고,

가능성으로 존재할, 저는 동참할 수 없는 그 세계에서 우리는 아름다울 겁니다.

그리고 나는 지옥을 살아왔다고 말할 것입니다.

 

Posted by 또복 :

 

 쌍둥이 무역 빌딩처럼, 홍대 전철 역을 나서면 근거리에 거의 마주보다시피 위치하고 있는

 두 곳의 만화점, 북새통과 툰크- 이틀 연속 스테레오랍과 함께 하고 있는 오늘밤,

 두 곳의 멋진 만화점 가운데 북새통에 관한 나의 짧은 기억을 얘기하고자 한다.

 

 몇 년 전에 나는 홍대를 찾았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볼일을 마쳤을 땐 이미 잔뜩 취해 있었다.

 나는 석관동이 아닌 남양주 본가까지 가야 했고, 그 어마어마한 거리와 시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술이 아마 취해 있지 않았다면 스물 살 때처럼 집에 가는 버스에서 술을 몰래 마시기라도 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이미 만취해 있었고 술을 더 마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다 북새통이 눈에 들어왔고, 난 비틀비틀 거리며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사실 북새통보다 툰크를 자주 찾는 편이라 아마 그때가 처음 북새통을 찾은 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난 형편없이 취해 있었고 계단을 굴러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인 지경이었다.

 심지어 나는 북새통의 전경마저 기억에 나질 않았다. 그냥, 만화가 '좀' 많은 책방이었고,

 그곳에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전집이 할인하고 있었고, 그것을 고민 없이 샀다는 것이 

 내 기억의 전부였다. 그 뿌듯함을 무기 삼아 나는 묵직한 상자를 끌어안고 집까지 쿨쿨 자며 잘 왔다.

 

 얼마 전, 나는 북새통을 다시 찾았는데 (만취 속에서 <불새>를 사던 그때 이후 처음이었다)

 우스운 것은 이 오타쿠, 후죠시들의 천국인 지하 벙커 같은 문화 오염 지대에 연로하신 우리 부모님을

 함께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나는 혼자 볼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두 분은 구태여

 나와 동행하셨다. (설마 이런 곳을 찾으리라곤 상상도 못 하셨겠지...)

 허나 나보다 깊은 식견과 경험을 지닌 두 분은 별다른 문화적 충격 없이 일상적으로 서점을 둘러봤고,

 나는 서재들을 유유히 돌며 딱히 찾는 책 없이 구경을 나섰다. 

 괜찮고 할인 중인 전집(데즈카 오사무 전집 같은)을 사고 싶었으나 마음에 드는 게 없었고,

 대신 카와치 하루카의 작품들이 있기에 두어 권 샀다. 왜인지 부녀자들이 빠르게 저희들끼리 중얼거리며

 구석에서 샥샥 책을 고른 후 후다닥 도망칠 것 같은 곳에 위치해 있었고, 빨간 줄에 19금이란 경고가 있었지만

 뭐... <아리송한 꽃>과 <케이크를 사러>.

 

 카와치 하루카의 큰 장기는 살면서 여리여리해지는 순간, 스치기만 해도 울음이 터질 것 같고,

 부풀어 오는 동요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런 순간과 삶과 동기화가 너무 잘 되어 강인한 그런 때를

 잘 포착해내는 게 아닐까, 하는 몇 권 안 본 독자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걸 뭔가 정형화된 후죠시 문화 틀 안에서 얘기하면 진짜 진부하게 재미없을 것 같고

 르페브르의 일상 이론이나 <아빠는 요리사>와 같은, 아름다운 일상계 만화와 삐딱하게 시비 걸듯

 함께 얘기하면 좋을 듯하다. (부디 우리 연로하신 부모님 내 서재에 숨겨놓은 두 만화를 보지 않길 바라며...)

 

 

그나저나 스테레오랍은 캐면 캘수록 보석일세.

만약 90년대로 다시 돌아가는 기적이 발생한다면,

또 우리에게 보다 깊은 사유와 미적 감각이 존재한다면

도래할 유토피아의 디스코 씬은 스테레오랍이 지배할 것이다.

95년, 뉴욕 센트럴 파크 공연을 촬영한 이 영상은 모든 것이 예술을 이룬다.

"존 케이지 버블껌"이란 제목의 다른 라이브 동영상을 찾아보면

달력 창고 같은 사무실에서 굳이 비좁게 모여 연주를 하는 클립이 있는데, 그것도 좀 웃긴다.

아름답고 슬프도다. 진정 비극이란 내가 더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것.

내가 알던 야생 호랑이들은 모두 건강할진저.

 

Ronco Symphony + John Cage Bubblegum, Stereo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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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어제는 새벽 다섯 시까지 편지를 썼고, 근무를 교대한 이후로는

 완전히 뻗어 쓰러져 저녁 늦게까지 잠을 잤다.

 곧 전역하는 간부가 사준 라면을 먹고 나서야 기운이 조금 돌았고,

 그린데이 음악을 음량 최대한으로 틀어놓고 공부하던 중학교 때의 기억이 났다.

 몸이 고장났을 때 무슨 노래를 들으면 힘이 날까, 하는

 그런 날.

 

 

French Disko, Stereo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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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쩐지 그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가령, 어딘가 글을 발표하거나 할 때 나 자신을 무어라 소개할 것인가, 하는.

 무직자? 소설가? 독립 연구가? 영상 시인? 활자 노동자? 좌파?

 어느 정도 정형화된 직업군에 내재된 상징과 기호 속으로 내 자신이 휘말릴까 무섭다.

 정형성을 탈피하기 위해 '별난 소개'를 시도하는 것 역시 우스꽝스럽게 미끄러지는 요즘,

 나는 정말 고민이다. 예전에는 '학생'이라 소개하면 그만이었고, 그 어중간함과 과도기성이 좋았는데

 이제는 얄짤 없이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오고 있다. 

 88년생, 남양주 출생, 영화학교 졸업, 모두 싫다.

 "몇년도 출생, 파리 정착"하고 유로피안다운 깔끔함을 자랑하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가 프로필을 때운 밀란 쿤데라도 싫다. 온갖 거짓말로 "자소서"를 보낸 뒤 "어느 게 진짜인지 나도 모름"

 하고 뒷통수 치는 샐린저만이 내게 큰 위로가 된다.

 

 2.

 얼마 전 홍대 서점을 찾아가 "토우메 케이"의 작품을 찾았는데, 비사교적인 오타쿠 행색의 서점 직원은

 정말 놀랍게도 "토우메 케이 작품은 현재 이것이것, 그리고 이것이것이, 그리고 이것은 3권부터 있습니다" 하고

 또박또박 설명해주는 거였다. 일단 나는 토우메 케이란 작가를 그가 상세히 알고 있는 것도 무척 놀랐고,

 설령 알고 있다 하더라도 서점 내 비치된 수많은 작품(의 위치와 권수까지)을 꿰차고 있는 직업 의식이랄까,

 나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그 프로페셔널(일반적인 그것과는 조금 다른)에 약간 감동하기까지 했다.

 그의 안내에 따라 나는 토우메 케이 작품을 여럿 구할 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1권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97년에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정말 최근, 작년인가, 장장 18년 만에

 완결되었다고 한다. 나는 사실 이 만화를 보면서 '이런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여건과 지면이 있다니,

 정말 그녀는 복받은 작가군. 역시 일본은 대단해' 하고 생각했는데, 연재지의 몰락과 중단 속에 포기하지 않고,

 심지어 2010년에는 소설판까지 직접 냈다, 이 지면 저 지면 옮겨가며 끈질기게 완성한 작가의 근성에 놀랐다)

 나는 이 만화를 숙취에 시달리는 가운데 행복한 일만 연이어 벌어지는 날 좋은 일요일 느긋하게 보았는데,

 술 기운이 채 떨어지지 않은 내게 이 만화는 나와 무척 닮아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만화의 주인공은 대학을 졸업하고,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말 행사처럼 찾아오는 가스, 수도 끊김과

 집세 걱정을 하면서도 (아직까진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취업할 생각도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남자다.

 만화의 첫 장에는 어두운 새벽, 아직 깨지 않은 그의 방, 어두운 전경이 묘사되는데

 거기에는 패밀리 게임기와 다이얼 전화기가 보인다. 집에 놀러온 그의 대학 동창은 이걸 보고 학을 뗀다.

 또한 그는 함께 졸업한 대학 친구를 사랑하지만 매사에 적극적인 그녀에 대한 존경심 때문인지,

 자신에 대한 환멸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보다 자신의 현재 처지를 수호하는 게 가장 급선무로 생각하는지

 고백하지 않은 채 헤어진다. (물론 그 이후의 상황은 급변하고, 이것이 첫 번째 에피소드 "사회의 낙오자는

 자기 혁신(혁명인가, 개혁인가)을 한다"의 주된 이야기다)

 내가 흥미로왔던 것은, 토우메 케이, 그리고 주인공 우오즈미 리쿠오는 자신을 '사회의 낙오자'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생각의 근거는 1. 구직 활동 중단. 2. 대졸자임에도 아르바이트 생활. 3. 구식 게임기와 다이얼 전화기로 대변되는

 퇴행적인 삶의 방식, 등으로 축약된다. 나는 좀 웃겼고, 항변하고 싶기도 했다.

 왜... 왜... 이게 사회의 낙오자지? 나도 이렇게 살고 싶은데...

 그런데 남이 보기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곧 들었다.

 

 3.

 작가는 가장 먼저 시대에 아픈 사람이라고 한다.

 좋은 만화는 본 사람으로 하여금 아프게 한다. (일주일 정도)

 나는 계속 앓고 싶다.

 성희 누나와 통화를 해서 기뻤다.

  

팬이 만든 <예스터데이를 노래하며> 매드무비

 

イエスタデイをうたって, RCサクセショ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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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구질구질한 인생

2015. 5. 29. 23:12 from blur girl's diary

 

 그룹 <부활>에서 기타 치는 김태원은 말한다.

 "내가 얼마나 외롭고 가난한지 말할 순 없어요. 말하는 순간 구차해지니까요."

 

 약속이 모두 취소되었을 때 나는 몹시 허탈했고, 그 정도가 지나쳐 웃음이 났다.

 약속을 위해 나는 상당히 구차해져야 했고, 주말 약간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렇게 인간이 구질구질해질 수 있는가,

 를 경험하며 몹시 우울한 주중을 보냈는데, 이런 내 맥락과는 상관 없이 친구들은 약속을 배반했고,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승낙을 위해 얼마든지 구질구질해질 수 있는 인간 이준하'뿐.

 (이는 어쩌면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킬 게 대체 뭐가 남아 있다고 그깟 구차함에 상처 받는가.

 친구를 위한 내 입장의 손상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 어쨌든 허가자와 구걸하는 처지 사이의

 구차하기 짝이 없는 알력 다툼을 지켜보고, 그 당사자로서 그 상황에 끼어 있는 것은 짜증스러울 정도로 우울한 일이다)

 

 약속 취소를 알릴 때, 나는 그들에게 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쾌활하게 웃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이런 내 맥락을 알지 못했고, 또 알 수도 없으며, 솔직히 알 필요도, 알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고의적으로 이런 내 맥락에 무관심하며 배반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심각한 투사의 결과로,

 심리 상담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무엇보다 말하는 순간 이 구차함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의 구차함으로 되돌아올 것 같아서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김태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방점은 '말하는 순간'에 있는 것 같다.

 생각이 발화를 통해 외부로 표출되어 그것이 대기를 부유하는 순간,

 '내 생각'은 '음성 정보'로 외떨어진다. 녹음된 자기 음성처럼 낯선 타자성의 발견.

 어찌 보면 객관적으로 다시 접하는 주관성의 조각. 거기서 구차함을 느낀다면,

 '내 생각'이 이렇게 구질구질했구나, 혹은 이걸 나는 몰랐구나, 하는 당혹감 내지는 인정의 거부 아닐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구질구질한 인생.

 로하스하게 살기가 이렇게 어렵다오.

 

Posted by 또복 :

노력은 당연해

2015. 5. 26. 23:04 from blur girl's diary

 

 오늘 저녁 식사를 하던 중 그야말로 퍼뜩,

 난 정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좀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너는 참 창의력이 출중한 아이로구나, 하는 얘기를 어려서부터 하도 들어서

 정말 나는 창의력이 출중한가보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가

 사실 창의력이 없거나 창의력이 없다고 일컬어지는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의 창의력을 갖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의 기분이랄까. 아무튼 난 정이 많다고 이전까지 생각해왔던 것이다.

 

 여지까지 많은 사람들은 나를 (내가 봤을 땐) 큰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주었는데,

 사랑을 물리적인 교환의 차원으로 보자면 난 그들에게 받은 양만큼 다시 돌려주어야 맞거늘

 늘 그렇지가 않으니까 문제다. 오히려 사랑만 받고 돌아서거나 그런 상황을 철저히 이용한 적이 많았다.

 순진하고 셈이 능하지 못한 컨셉팅을 내세우며 등처먹은 거다.

 애초에 사람들에게 정을 쉽게 주지 않고, 믿지 않았음 역시 깨달았다.

 나는 타인의 사회화된 행동 속에서 내가 경멸하던 경험을 투사하여 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고 혐오한다.

 때문에 그를 온전히 알기도 전에 그는 나와 적이 되고 만다. 나는 그에게 가장 차가운 태도를 보여준다.

 

 진짜 문제는, 나와 깊은 관계에 있는 친구들에서 발생한다.

 나는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사랑, 그리고 그들과 내가 공유하는 사랑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제야? 하고 냉소해도 좋다)

 이 충격은 방어 준비를 하고 관계에 임하던 위의 경우와 격이 다른 내파를 불러 일으켰으므로

 나는 더더욱 정나미 떨어지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의지하며

 그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은 근본적인 삶의 동력임과 동시에 (적어도 내게 있어) 형벌이다.

 그것은 내게 끊임없이 무시무시한 자각을 준다. 날로 먹지 말 것을. 노력할 것을.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노력하는 게 당연하단 것을.

 이 노력과 피로가 싫다면, 텔레비전을 껴안고 아파트 아래로 뛰어내리는 게 좋을 것이다.

 오늘 들은 얘기인데, 투신 자살을 할 때 무언가를 안고 뛰어내리면 사망율이 급격히 상승한다고 한다.

 끔찍한 얘기였다. 

 

 

Posted by 또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