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ghtnin' Hopkins Blues

2015. 5. 23. 23:06 from blur girl's diary

 

Lightnin' Boogie Blues

 

Gambler's Blues

 

Have you ever loved a woman

 

Hopkin's Sky Hop (THE ORIGINAL RUDE M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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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한 순간

2015. 5. 15. 23:02 from blur girl's diary

 

 나는 매일 16시부터 체력단련실에서 한 시간 가량씩 운동을 한다.

 작년 여름부터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빼먹지 않고 하는 편이다.

 가끔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음반을 틀기도 하는데, 요즘 아이돌에 편중된 아이들의 선곡 취향과

 심각한 괴리가 있어 조금 민망하기도 하다. 레드벨벳이니 미쓰에이만 듣다가

 갑자기 테디 윌슨의 피아노 연주곡이나 해피 먼데이스를 틀면 분위기가 참 묘하다.

 

 오늘은 체력단련실에 사람이 없었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와일드 지미 스프루일"의 비공개 음원 모음집을 틀었다.

 그는 50~60년대 활동하던 기타리스트로, R&B라고 앨범에는 장르가 규정되어 있긴 하지만

 재즈 전성기의 스윙 리듬이 강하게 묻어 있는 블루스에 가깝다.

 (대만 시골 클럽에서 포마드 바른 아이들이 아직도 부르고 있을 법한 그런 음악이다)

 

 그런데 30분 정도가 지나자 다른 아이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품에 "위너스"의 앨범을 끼고는)

 나는 "고참"답게 묵묵히 (50년대 R&B를 들으며) 삼두근 자극을 계속했고,

 그렇게 "95년생"들과 (50년대 R&B를 들으며) 함께 운동을 했다.

 

 그러다 한 아이가 갑자기 체력단련실 가운데에서 혼자 춤(같은 동작)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어여쁜 여자 아이를 끌어안고 있듯이, 허공에 손을 뻗고 빙글빙글 도는 것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그야말로 얼이 빠져,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그는 씨익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이런 음악 아닙니까?"

 

 그것은 정말 중경삼림 한 순간이었다.

 (중경삼림 한 순간 : 영화 후반부, 정전이 된 스낵 바 씬을 다시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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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ry Of Love, Big Bill Broon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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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 me something

2015. 5. 14. 23:09 from blur girl's diary

 

 

당직 근무가 끝나고, 교대까지 무사히 사수한 양파맛 감자칩을 들고, 커튼 너머 오전 일과의 빛이 나른하게

새어 들어오는 생활관에 누워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2의 에피소드 3개를 연이어 보았다.

침해받지 않는 개인의 공간과 시간, "정크"한 먹을거리와 드라마(혹은 게임, 만화, 통틀어 "서브컬처" 전반)의 상관관계에 대해

연구해보고 싶을 정도로 노동이 가혹해질수록 이 "정크"한 일상에 우리는 가련할 정도로 집착하게 된다.

 

여하간!

나는 대체로 중독에 약한 편인데,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화끈하게 무언가에 빠지면 질릴 때까지 끝장을 봐야 하는 성미 탓일까,

좀 걷잡을 수 없이 탐닉하는 경향이 있어 무언가 시작하기가 무서울 때가 많다.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 1도 퍽 재미있게 봤는데, 그걸로 끝이라고 접어놨는데, 어쩌다 보니 시즌 2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봐버렸고", 으앙, 망했어요. 결국 다시 불붙은 드라마의 열기 속으로. 시험 준비도 빠듯한데 큰일이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그들 나름대로 "통쾌하게" 털어냈다고 생각한 밤,

부부는 전자 담배를 나눠 피운다. (원래 피우던 연초는 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끊게 되었음)

그러다 클레어는 말한다. 진짜 담배가 피우고 싶은데.

그러자 프랭크는 스탠드 아래에 몰래 숨겨둔 '진짜 담배'를 슬쩍 꺼내준다. 산타 클로스처럼.

감격하며 담배를 피우는 클레어는 프랭크에게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고

남부 민주당원 프랭크는 시니컬한 컨츄리 송을 불러준다.

 

케빈 스페이시는 늙어도, 배가 나와도 "토요일 밤의 열기"를 기억하는 댄스 파티의 주인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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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 싫은 일에 직면하면 그 하기 싫은 일을 제외한 모든 일은 재미있어진다.

 (우습게도 이 재미는 하기 싫은 일의 종료와 함께 소멸한다)

 그런 맥락일까.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를 오늘 한 시간 정도 읽어보았다.

 앨범 타이틀 <보통의 존재>가 그런 의미인 줄 몰랐는데, 

 이석원은 아무래도 본인이 독보적인 유니크함의 소유자인 줄로만 알았나보다. 

 그러다 문득 '어, 어쩌면 난 천재가 아닐지도 몰라' 하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내가 (저 따분하고 경멸스러운) 보통의 존재였다니...' 그런 깨달음으로 책은 시작하고 있다.

 글쎄, 그가 선택한 '보통'이란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연상하는지 몰라도 대중으로 환원되는 익명적 다수로서의

 보통이 성립되기 위해선 비교 가능한 대상이 있어야 한다. 보통이란 평균값을 의미한다.

 개인의 유니크함을 드러내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보통의 존재가 필요하다. 남에게 없는데 나에겐 있는 것.

 모두가 유니크하거나 모두가 보통인 상태를 상상해보라. 천재와 범인, 일상과 이상의 구분은 무용해진다.

 (그래서 이석원은 고백했다시피 자신과 '보통의 존재' 사이의 경계 짓기, 구분하기에 늘 신경을 썼다.

 상처가 잘 아물지 않는 본인의 희귀한 체질, 다사다난한 가족 내력, 공연 때면 유난스러울 정도로 예민해지는 감각들,

 유달리 소음에 민감하고 까칠하며 공격적인 시니컬한 기질들... 이는 자연스레 '그렇지 않은',

 무디고 억척스럽고 무지한 타자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민감한 천재 뮤지션' 이석원은 맞은편에 존재할

 '멍청한 관객'으로 말미암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뒤늦게' 깨달았다시피 이 구분은 기실 

 자의적인 선 긋기일 뿐이고, '천재 뮤지션'이나 '멍청한 관객'이나 요지부동하는 사회 틀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이 미끄러짐 속에, 다함께 뒤흔들리는 팝콘처럼 뒤섞이는 통 속에서 서로의 구분을 모색하는 건 짠할 정도로 슬픈 일이다.

 그의 깨달음에 나는 이렇게 되묻겠다. 무엇이 우리를 보통의 존재로 만드는가. 혹은,

 우리는 과연 이곳에서 보통의 존재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이 불능하다면 그 방해 공작의 주체와 전략은 무엇인가?)

 

 이석원이 9년간 기록한 일기는, 그에게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조금도 감흥을 주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뭔가 노골적으론 아니지만 에둘러 '난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고독하고 외로움을 자처하면서

 곤조를 지키는 민감한 예술가야. 이혼도 하고 돌싱이지만 결혼은 안 할 거지롱. 그게 40줄 중년 남성의 멋 아니겠어?' 하고

 어필하는 것이 구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면 얼마 전 한겨레에서 읽은 부활의 김태원 인터뷰는 생각 외의 감흥을 주었다.

 한번 검색해서 읽어보라. 과거 밴드 친구들에 대한 인식이나 가난함, 외로움에 대한 입장은 이석원과 김태원

 비슷한 듯 묘하게 달라 흥미롭다) 더군다나 이소라를 '소라 누나'라고 부르며(별로 친한 것 같지도 않은데)

 나이가 어린 친구들에게 '형은 말이야' 하고 자신을 꼭 '형'이란 호칭을 붙여가는(물론 서로 친하겠지) 것도 맘에 안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와 나는 10살 차이가 나고, 유행 지난 세대 담론에 의거하면 그는 X세대, 나는 밀레니엄, N세대에 해당한다.

 (혹은 X세대와 밀레니엄 세대가 활약할 때 유년기였으니 프리틴 세대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

 관련 논문에 따르면 X세대는 숙명론적이고 회의적이라고 한다. 프리틴 세대는 기업가적 마인드에 초긍정적이고.

 멀더와 비글의 간극이랄까. 뭔가, 이석원의 산문을 보며 X세대 아저씨 같아 마음이 짠해진다.

 새롭고 독보적인 것. 자신이 그러하다고 믿는 것. 객관적인 진리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또 그것을 누가 판단하겠냐만

 새롭다고 그가 믿는 것이 사실은 새롭지 않을 때의 그 짠함. 

 모두가 자기가 믿는 현실에 달라붙어 사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예전에 나리 누나와 술 마시면서 언니네 이발관의 <아름다운 것>에 대해 얘기하다가

 '그래도 결국 하나 해냈구나' 하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상당히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는데,

 나나 나리 누나나 사실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노래방에 갈 때마다 <유리>를 부르던

 영조 형을 우리가 얼마나 갈궜던지.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마스터피스이다)

 

 가끔 나와 동기화된 현실이 못 마땅스러워 소리를 악! 지르며 발작하고 싶은 충동이 들고,

 또 이 순간이 자칫 트라우마와 같은 기억이 되어 앞으로도 나를 좀먹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지만

 그럴수록 행복하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소중한 공간과 풍경을 떠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그와이의 <Take me somewhere nice>도 간만에 떠올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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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urder Ballad, Jelly Roll M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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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문득 박지우야말로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예술가에 가까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깨달음의 재미있는 점은 '박지우야말로'에 있다. (이말인즉, 그 전까지 그는 내게 있어 '예술가'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니까) 나는 그를 2004년 고교에서 영화를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고, 음악에 푹 빠져 있던 2007년 이후에는

줄곧 함께 합주를 해왔다. 제대 이후에는 공동 작업이 뜸해졌지만 그래도 학업 중에 공연을 하고, 글을 써온 걸로 안다.

졸업 후에 그는 애니메이션과 게임 제작회사 등지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우주적>이란 어쿠스틱 그룹으로 음악을 만들던 2007년 무렵의 그는 정말 기계적으로 무언가를 만들었다.

영혼 없이 양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루에 한 곡은 꼭 쓴다', '일주일에 시 세 편은 꼭 쓴다'는 식으로 쉴 새 없이

결과물을 뽑아냈다. (자기만의 창작 계획표가 있을 수도 있다) 예술, 문화 분야에 관심 있는 대학생 치고 20대 시절에

밴드 안 한 사람 없을 정도로 '반짝 뮤지션', '나도 뮤지션'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다가 졸업과 함께 홀연히 소멸하는

요즘에도 그는 계속 창작을 하고 있다. (물론 시나리오 작가란 본인의 직업을 창작의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가 '본격적인' 예술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창작보다 현실과 생업에 대한 고민을 우선시 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판단이 애초에 잘못 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고, 비슷한 시기에 박지우는 그간 써두었던 시들을

모아 시집 <잡념의 시간>을 발간했다.

 

 '기계적으로' 창작하는 박지우는 동시에 끔찍하게 내향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이다. 내가 아는, 내가 관찰한 박지우는

새로운 관계를 굉장히 부담스러워 하고, 쉽사리 참여하기를 주저하는데다가, 소극적으로나마 손길을 내밀면서도

되돌아온 반응에 민감하게 상처를 받았다. (물론 내가 그의 모든 관계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가 '신중하게' 선택한 몇몇 소수 관계를 제외하면 나머지 관계에선 철저하게 공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거리를 두었다.

이러한 폐쇄성으로 '예술가' 박지우는 당대의 예술 씬에서 고립을 자초하게 된다. 창작 동료들도 극도로 제한되고,

자신의 창작물을 비교할 대상도, 피드백과 지지를 받은 대상도 별로 없고, 작품 발표도 소극적이거나 애당초 시도조차 안 한다.

그 결과 박지우의 시와 노래는 시집 제목처럼 거울을 마주보고 혼자 중얼거리는 '잡념의 시간'의 '기계적인' 기록물 같다.

시집 <잡념의 시간>은 그 결과물의 소산이자 폐쇄적인 망상가 박지우의 의례적인 행보다. 적은 수량이나마 출판을 했고,

인터넷에서 판매까지 이뤄지고 있으며, 지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으니, 전과 비교하면 굉장한 변화다!

그와는 별개로 그의 시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선 위와 같은 맥락을 이해하고, 박지우의 골방으로 들어가며 '정중히'

행동해야 한다. <잡념의 시간>은 그의 잡념이 공간화된 일종의 자기세계, 자기영역이다.

 

 <잡념의 시간>, 혹은 박지우 시(와 노래)의 근본적인 주제는 '나'라는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나'와

그런 '나'와 대립하는, '나'를 '나'로서 지탱할 수 없게 하는 외부 조건과의 투쟁, 알력다툼에서 불거진 '잡념'이다.

"나는 4평의 어느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 나는 혼자다. / 너도 그랬나? / 그건 알 수 없다.

왜냐면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 없는가? (뇌까리기 3 부분 인용)"에서처럼

박지우의 시에선 '나'와 '너'의 구분이 명징하고, 이 둘의 대립은 전제조건처럼 태생적이고 숙명처럼 지난하다.

나는 널 모르고, 너도 날 몰라. 이것이 타자와 나의 기본전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내가 '나'를 명백히 아는 것,

'나'가 '나'임을 증명하고 유지하는 것이리라) 박지우는 여기서 "그런데도 우리 사이에 대화가 필요 없는가" 하고 묻는다.

여기서 타자는 불가해한 제3의 존재(에일리언처럼 적대적인 생명체일 수도 있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회 구성원일 수도 있다)

이면서 닿기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대상이다. 소쉬르는 언어의 발달사를 논하며 근원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지방근성과

세계로 뻗어 나아가고자 하는 교류성의 개념과 그 둘 간의 긴장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이는 사회구성체의 인간으로서 갖는

태생적 조건이기도 하다. 박지우의 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긴장(과 본인 스스로 느끼고 있을 두 모순되는 힘)은

그로 하여금 어떤 태도를 고수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게 한다. "우주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은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다. /

사람은 별이 되어 간다. / 하지만 별빛보다 불빛을 더 가까이 하는 이유는 뭘까? / 그건 별빛은 너무 멀기 때문이 아닐까 (…)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뇌까리기 3, 부분 인용)" 그는 타자와 세계의 "절실한 그 무언가"를 갈망하면서도

"절대 타인의 영역에 침범한다든가 간섭하면 안 된다(뇌까리기 6, 부분 인용)"고 못을 받는다. 이쯤 되면 블러(Blur)의

<Coffee and TV>에서 "사회생활은 내게 너무 힘들"다고 노래를 부르는 그레이험 콕슨(소년과 어른이 공존하는)이

떠오르지 않는가? 확실히 박지우에게도 사회생활은 지방근성과 교류성의 무수한 반복과 번복, 후회와 채근의 연속이다.

"'나는 사슬을 끊고 싶다' / A가 말한다. / "그 영화 어때요?" / 사실 별반 중요하지 않다. / 팽개쳐져도 괜찮다. /

5분, 10분, 1시간 그리곤 답이 온다. / "그냥 그래요." / 이어가야 한다. / 이어감에 대한 강박. / 하지만 다시 침묵.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든 건 제자리를 지킨다. (뇌까리기 6, 부분 인용)" 사회생활 속에서 구성원들과의 각축을 이루는

갖가지 방법론은 결국 그에게 어떤 회의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나는 네가 아니고 나이기 때문이다. (뇌까리기 6, 부분 인용)"

어떻게 보면 편리한 합리화 같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사회생활의 필연적인 파국은 방법론의 오류 때문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이유,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인 소통 불능에 있다. 그렇다면 우린 애써 사회생활의 피로를 감내하며 인정투쟁에 연연할 필요도

없고, 호감을 살 이유도 없어진다. 그냥 '나'를 닮은 '너'에게 존재하는 '나'의 어떤 부분을 취사선택하여 멋대로 해석하고

즐기면 그만이다. 하지만 유아론에 가까운 이런 태도,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체념하며 자아에 침잠하려는 태도에 대해 박지우는

의구심을 갖는다. "보이는 대로 이해하라는 건 상대방에게 꽤 잔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 그러므로 난 지금까지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한 것인가? (…) 우린 자기 자신이 너무 개인적임을 간과하고 있다. (…) 이것이 나의 최대 타협점이다. (뇌까리기 7, 

부분 인용)" 박지우의 시(와 노래)는 세상과 소통하려는 그의 "최대 타협점"이 분명하다. 그러나 거울과 나눈 대화를 일방적으로

던져주고 "보이는 대로 이해하라"는 건 적은 단서만을 제공하고 사건을 해결해보라는 짓궂은 추리소설 작가의 심통 같기도 하다.

타자와의 반응과 대꾸 없는 이 자기애적인 교류의 기록은 "허공의 메아리"일 따름이고, 그는 "자꾸 좌절한다".

박지우는 이 비극적인 결말만이 주어진 비극적인 게임의 비극적인 주인공이 되어 조울을 넘나든다. 그 결과 "숨이 차오를 때쯤 /

겨우 그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인 그대. (나무에 올라, 부분 인용)"에 환호하다가 이내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필요하지 않게 돼간다. (뇌까리기 8, 부분 인용)"며 기대를 접는다. 

그리고 기대에 이은 실망과 좌절은 자기혐오로 되돌아온다. "잘못의 근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 그게 참 슬프긴 하지만 현실 /

생각이 자꾸 자기 탓으로 흘러간다. (뇌까리기 8, 부분 인용)"

 

 2013년, 나는 그와 함께 <Second Coming>이란 작은 합동공연을 기획한 바 있다. 그것은 2007년 <우주적> 이후로 갖는 우리의

첫 번째 공연이었는데, 그의 노래를 5년여 만에 다시 듣고 난 큰 충격을 받았다. 그의 노래는 정서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냉동 수면된 우주인처럼 시간의 영향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굳게 흔들리지 않는 그의 '곤조'를 발견했다.

공연이란 특성상 실시간으로 공개하는 '나'와 그걸 듣는 관객의 '반응'이 보이지 않는 화학작용을 만드는 상황 속에서도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준비한 노래-자기를 불렀다. 나는 그 힘을 뒤늦게 알았다. 화려한 연주와 소란스러운 호응과 비평에 무뎌졌던

'작은 노래'의 '작은 가치'가 유달리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예술 지형에선 자기 PR을 넘어 자신의 재능을 빠르고 전략적으로 자본화하는 과정(이는 이미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보편적인 덕목으로 자리잡았는데, 일본의 팝 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의 사례를 상기해보자)을 모두가 체득해야 한다. 거기에

누락되면 예술의 근본적인 지탱 요소인 관심과 인정으로부터 제외된다. 적극적인 교류 대신 폐새적인 자기를 유지하고 일관성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 박지우는 일견 그러한 흐름에 도태된 것 같지만 누가 알겠는가. 문화 자본의 거품이 사그라지고 자신의 역사와

현재의 삶과 창작을 일치하는 새로운 예술의 관심이 다시금 대두될지. 메이저 출판사와 신춘문예 등단이란 정통 주류 노선이 아닌

부크크란 독립 출판 매체를 거쳐 자신의 시집을 지인들과 향유하는 그의 선택 역시 자신의 행동반경 내의 세계를 구성하고

이해하는데 공력을 집중하는 '1마일족'의 마이크로 정치성과 부합한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오늘날 예술이 어떻게 상품이 되고, 그 상품이 예술을 집어삼키는지, 작품 활동과 작품이 소비되는 과정을

통해(자신을 그야말로 산화하며)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인정'이다. 문화 자본화한 오늘날 예술 '시장'은 작품과

작가에서 주어지는 인정을 수량화하여 값어치를 매기고, 거기에 따라 작품의 고과를 판단한다. 이것은 비단 뉴욕 화상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마트한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에 깊이 연루된 사회 구성원 일상 전반에 걸쳐 자행되고 있는 현상이 되었다.

(디지털 문화에서 형성된 파생현실 '시뮬라크르'에 기반한 창작이 다시 일상으로 침투하고, 다시 시뮬라크르를 낳는 지점에 대해선

다른 지면에서 서술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다) 이 눈알 돌아가는 게임 속에서 '나'와 타자의 소통 불가능성을 고민하는 박지우의

소박하고 퇴행적인 시는 역설적으로 시의성을 갖춘다. (상업화를 거부하며 완고하고 구차하게 자신의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만화가 로버트 크럼이나 자신만의 엄격한 기준으로 촬영한 사진을 죽는 순간까지 발표하지 않은 비비안 마이어가

다시금 조망 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이는 어쩌면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새로운 문화 분석과 관계맺은 준거 틀이 요구되고

있는 오늘날, 다시 돌아가 확인해야 할 출발점일 지도 모른다. "결국엔 본질은 자신으로 돌아간다. (…) 중요한 것은 책임과 무게와

한계를 느끼고 발화하는 것. / 산화가 아닌 발화. (뇌까리기 10, 부분 인용)" 그가 정녕 자기 침잠 끝에 잠념으로 용해되는,

혹은 무라카미 다카시처럼 상품과 자본의 파생현실로 기꺼이 산화(散花)되는 게 아닌, 상대적이고 불가해한 타자들의 세계 속에서

유일무이한 '나'의 유니크함을 조그맣지만 지치게 않게, 어떻게, 발화(發話)해나갈지 지(지하며)켜보자.

 

 

<잡념의 시간> 구입 ☞ BOOKK

 

 

LONELY SONG, 박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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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不思議な力

2015. 5. 7. 23:05 from blur girl's diary

 

 지난 일요일, 피아노를 치고 있는데 최근 전입 온 아이가 쭈볏쭈볏 구경을 왔다.

 어쩐지 피아노를 연주해보고 싶어 하는 눈치인지라 자리를 내주었는데, 곧잘 했다.

 우리는 조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후쿠오카에서 1년간 경제학을 공부했고,

 고시엔 선수 같은 까까머리에서 드러나듯 야구를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한신 팬)

 나는 그에게 피아노를 어떻게 연습하냐고 물었고, 그는 (역시 독학이었는데)

 1) 좋아하는 노래의 악보를 구하고 계속 친다.

 2) 막히면 왼손, 오른손 따로 친다.

 3) 그래도 막히면 아는 선생님에게 물어본다.

 4) 그래도 막히면 될 때까지 친다. (5시간 정도?)

 하고 대답했다. 그렇구나. 5시간 정도.

 

 밴드를 할 때 만났던 밴드 친구들의 연주 실력을 보면서 항상 감탄을 했고,

 나(혹은 우리)의 미숙함이야말로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는 하나의 경계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결정적인 차이, 의도된 불안함과 한계에서 새어 나오는 허접함은 가릴 수가 없었다.

 나의 밴드 친구들은 참 연습을 많이 했다. 하루종일(비유가 아니다) 합주를 했다는 성건이나

 이른 저녁에 찾아와 새벽 늦게까지 동생과 같은 노래를 불러대던 지완이나

 합숙을 하듯 대공분실 지하 합주실에 처박혀 좌절하듯 믹서 앞에 앉아 있던 404 여러분,

 평소 인간 됨됨이 만큼이나 성실하고 꾸준하게 연습을 하던 대윤이나 

 그야말로 오지게 했다. 그럼 반문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왜 치열하지 못한가?

 이건 참 의문이다. 나는 지금껏 나름 열심히 나를 내몰고, 성실하게 그 몰아붙임에 순순히 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알고 보면 '정말 죽도록' 하는 아이들과 비교하면 그냥 그런 수준인 것이다.

 그 '죽도록'의 차이가 결국 그때 우리 음악의 차이를 불러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건 밴드 해체 이후의 일.

 그런데 나의 집중력은 좀 짧은 편이라(또 집중하는 동안의 버프도 뭔가 강력한 것도 아닌 것이)

 5시간이고 온종일 하나에 매달리는 성격도 못 되고, '이거다 싶은 것'은 되게끔 노력하는 그런 독함도 없으니

 그냥 지금처럼 마이 페이스를 지키며 유유자적 산보하듯 살아야겠다,

 고 생각이 든 건 오늘 오전 화장실의 햇빛을 바라보면서의 일.

 

 성희 누나 만화에 대해 조금 더 얘기하고 싶다. 그 '울고 싶은' 지점에 대해서.

 나는 입대를 앞두고, 태평양 홀을 꾸미면서, 슬펐다.

 소파를 들여놓고, 브라운관을 뺀 텔레비전 속에 전구를 설치하며, 일주일 내내 새벽 늦게까지 혼자 공간을 꾸미면서

 슬펐다. 정말이다. 내가 떠날 공간에, 그토록 사랑하는 공간에, 이제 나는 없고, 나 없을 그곳을, 그땐 없는 내가 꾸민다.

 미친 거 아냐? (그런데 더 슬픈 건, 내가 간 이후로 아예 그 공간이 사라졌다는 거) 슬픈 인테리어였다.

 그런데 감정을 거두고 생각해보면 인테리어가 슬플 수는 없다. 슬픈 컨셉으로 인테리어를 꾸미는 것도 어불성설 같다.

 가능한 게 있다면, 인테리어를 하는 사람의 슬픔과, 인테리어를 보는 사람, 그 안에 있는 사람의 슬픔일 게다.

 이는 인테리어에 내 정서를 투사하는 것이고, 객체에 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해당 사물과 순간을 자의적으로 전용하는 것이다.

 이를 성희 누나 만화에 대입시키면, 누나 만화에 나오는 많은 장면과 풍경은 덤덤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산보하는 기계가 감정 없이 기록한 스냅 사진처럼. 그런데 그것은 슬프다. 그 안에서 나는 울고 싶다.

 그 울고 싶음은 그 장면과 풍경에 내가 슬픔과 무기력과 한없는 소외, 혼자 있고 싶은 지방근성과 세계와 연애하고 싶은

 교류성 속의 혼란을 투사시킨 결과이다. 성희 누나의 만화는 일종의 인덱스처럼 해당 장면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에서

 새겨진 '울고 싶은 순간'을 소환한다. 누나의 맥락과 나의 맥락이 딱 부합되진 않더라도 그 갭을 매우는 건

 그 슬픔의 어마어마하게 강렬한 감정적 에너지(와 소진 이후의 여운)일 것이다.

  

 나는 요즘 불안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싫은 분위기와 자리가 많이 마련되고

 그것에 익숙하지 않아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눈물이 터질 것만 같다.

 (내 나약한 기질을 군 생활 내내 연기적인 오지랖과 사교성으로 가렸건만 지금은 그것이 피곤하다.

 말년이라고 일을 기피하는 것도, 또 그것에 자격지심과 내 스스로에 환멸을 느끼는 것도, 

 성희 누나처럼 표현하자면'미안하기도 지겹다')

 상정이 형을 보면서 누차 드는 생각. 결국 이해받지 못할 타자들의 세계에서 유일한 구원은 짝이다 : 

 연애, 결혼, 오랫동안 곁에 머물며 각자의 역사를 공유하며 고통의 기억을 헤쳐나갈 수 있는 관계라면 무엇이든.

 석관동 카페 그램 앞, 카센터 앞 지저분한 도로를 걸어가는 성희 누나가 말하는 것처럼 나도,

 혼자이고 싶지 않아.

 

일본어 강의를 들으면서 "不思議な力, 후시기나료쿠",

상한 힘이란 단어가 등장했는데 정말 요상하게 웃겼다.

 

Posted by 또복 :

젠장

2015. 5. 6. 23:02 from blur girl's diary


 요 며칠간 소설 자료와 JLPT 시험 준비에 파묻혀 있다. 

 금연 이후로 야외로 잘 나가지도 않고, 온종일 코앞의 종이짝만 보고 있으려니 좀이 쑤신다. 

 그나마 한숨 돌리는 건 막 내린 커피를 마시며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전경 구경할 때뿐.

 (그것도 그냥 인공적인 뒷산, 건물 뒷편이 고작이지만) 

 

 성희 누나와 누나의 만화에 대한 생각 : 누나의 만화집 <몹쓸 년>은 난 아주 늦게 보았다.

 가만 생각해보면, 난 학교에서 만난 누나에게 언제나 김수박 쌤 얘기만 해댔다. 게다가

 자기 만화는 읽어봤냐고 농담처럼 힐난하는 누나에게 나는 '빠른 시일 내에 읽겠다'고 뻥을 치곤 했다.

 (사실 그때는 만화를 읽을 생각도 딱히 없었다) 

 약속은 시간이 훌쩍 지나, 내가 입대하고 또 제대를 앞둔 시점에서야 지키게 되었는데,

 어서 누나를 빨리 만나고 싶다. 천천히 술 마시면서 오래 얘기를 나누고 싶다.

 그 어떤 만화보다 '울고 싶은 순간'을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는 성희 누나의 만화에는

 누나를 닮은 인물들이 아주 많이, 스쳐 지나간다. 

 대충 뒤로 묶은 머리와 후즐근한 옷차림으로 석관동을 걸어가는 누나의 모습.

 햇살이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만화의 캐릭터들이 자주 내뱉는 

 '젠장'이란 표현이다. 온갖 고단함에 눌려가면서, '얼큰하게' 울면서, 혹은 '왜 울리고 난리인지' 

 모를 가족 때문에 울면서 누나들은 '젠장... 젠장... 젠장...' 하고 눈물을 흘린다.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 (박재동 선생님의 성의없는 추천사도 잊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케이블 방송에서 나온 장범준의 강남 건물 구입 소식을 접했는데, 

 난 몹시 화가 났다. (질투라고 해야 하나?) 아이들은 '벚꽃 연금'이라고 비아냥거렸고,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는 나 역시 그들과 도찐개찐. 남의 수입에 신경 쓰는 것만큼 무용한 건 없지만서도 

 강남 건물주가 된 장범준(나보다 한 살 어린 노무 시키가!)에게 분노하는 나는, 

 그렇다. 속물이다. 요즘 나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상황과 조직의 문화를 결국 초월할 수 없는 것일까? 아님 원래 내게 내재된 저속함이 균열된 지면을 뚫고

 만개한 것일까? 나는 이제 일도 안 하고, 온갖 핑계를 대며 도망다니기 바쁘고, 내가 욕했던 사람들을 

 따라 욕 먹을 짓을 자처하며, 그것이 비윤리적임을 알면서 내 잇속을 챙기기 위해 뻔뻔하게 살고 있다.

 이 저열함의 인정이 무서운 것은, 내가 주장하는 이 사회의 빌어먹음이 사실은 그냥 세상에게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고 싶어서, 내가 열세에 놓여있음을 인정하기 싫어서, 우세하고 싶어서 부리는 땡깡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그것은 좌우 이념도, 어떤 이론도 중요하지 않고, 그건 선택에 지나지 않고,

 다만 내가 지금 세상에 지고 있다는 느낌, 그걸 타파하기 위해 우세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일 것이다. 

 한마디로, 자기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만 직성이 풀리는 유아틱한 이기주의자. 

 그게 바로 나다. 

 

 이런저런 생각들 탓에 요즘 쬐끔 우울하지만, 

 그래도 앞으로도 계속 지킬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1. 금연 

 2. 폭음 절제

 3. 규칙적인 운동

 4. 소식(小食)

 5. 한겨레 종이신문 구독 

 6. 인터넷과 먼 삶 

 7. 계절에 따른 음악 청취 

 

 여기에 집 근처의 천주교구 성당 미사 참석과 자동응답기능이 달린 전화기 설치와 

 친구들의 생일에 맞춰 연하장을 보낼 편지지와 우표만 준비해놓으면 

 완고한 좌파식 라이프 스타일 완성. (꽥!)

 

Posted by 또복 :

 

 인디 팝이란 가능한가 :

 다수의 소비를 전제로 하는 소비 문화의 첨병 팝은 필연적으로 예술을 상품으로 만들고,

 감상자를 소비자로 만들고, 체험을 구매와 단가 측정으로 환원하고, 한없는 특수성을

 수학적 보편성으로 탈바꾼다 : 팝의 이데올로기.

 소쉬르의 언어학에 "지방근성"과 "교류성"이란 개념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회적 인간의 산물로

 개인으로 회귀하고 머물고자 하는 지방근성과 타자와 세계로 나아가고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교류성,

 이 반대되는 힘의 공존과 긴장이 존재한다는 것. 이 개념을 차용하면, 인디는 지방근성에 가까울 것이다.

 개인의 사적 경험, 특수성, 독보성, 유니크함 : 그러나 이것은 팝의 언어로 규정되는 순간

 "한없는 특수성"은 휘발되고 팝의 기호에 의거 재배치되는 현상을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디 팝은 과연 가능한가? 이 상반된, 서로 반대로 나아가려는 힘은 공존할 수 있는가?

 팝의 기호를 수용하여 갖고 노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은 끝끝내 탈주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그것마저 새끈한 굿즈로 배열하여 쇼윈도 안쪽에 에디팅하는 팝의 포용력이 더 강력할까.

 

 삐삐 밴드의 <불가능한 작전>을 시디로 구해 들어보았다.

 이제 거의 10년 전의 음반, 그것도 당시 "문화 혁명"급으로 추앙 받던 밴드의 두 번째 (징크스) 앨범을

 평가하는 게 뭔 의미겠냐만, 삐삐 밴드는 아주 영리하게 당시의 록 트렌드를 잘 흡수해왔다는 느낌.

 1집 <문화 혁명>이 90년대 초 영국을 휩쓴 기타 팝, 백화점식 팝,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블러(Blur)의

 방법론을 당시 한국을 휩쓴 '신세대론', 'X-세대론' 세대 담론과 버무린 후 이윤정의 흥미로운 포지셔닝,

 2집에선 빨간 뿔이 쑥 튀어나온 '삐삐'로 형상화된, 이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케이스일 것이다.

 예상을 했는지, 아니면 기대 이상인지 삐삐 밴드는 굉장한 주목을 받았고, 가히 2집 징크스란 부담 속에

 그들이 내놓은 <불가능한 작전>은 "팝의 종언"을 선언한 데이먼 알반이 택한 이후 행보, 혹은

 영국 팝 씬의 퇴보, 포스트 펑크, 덥스텝, 일렉트로닉, 트립합, 인디 디스코 등의 장르와 궤를 같이 한다.

 삐삐 밴드의 앨범을 개별적으로, 또 당시 90년대의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들었다면 퍽 놀라운 반응이었을 터.

 그렇다고 삐삐 밴드를 '당시 록 씬을 표절한, 흉내낸' 짝퉁이라고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삐삐 밴드는 분명 그들만의 스탠스가 있고, 나는 그것이 그들을 집어삼켰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의 유익함은 드넓다.

 

 <불가능한 작전>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1번, 그리고 2번 트랙의 흐름 :

 앨범 첫 곡과 두번째 곡의 리스팅은 앨범-음반 소비 시장이 두터웠던 과거 록 씬에서 정말 중요했으리라!

 <슈풍크>와 <나쁜 영화>였다.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이윤정의 보컬로 단촐하게 구성된 <슈풍크>는 가히 충격적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나쁜 영화>인데, 어어부 프로젝트의 백현진이 쓴 가사를 '읊조리는' 이윤정의 목소리는

 <슈풍크>와 천지 차이여서 무척 놀랄 것이다. 사실 이윤정의 이중적인 캐릭터는 1집부터 어느 정도 드러난 바 있다.

 <안녕하세요>, <딸기>와 같이 말광량이 여자아이의 '발광'이 한 켠에 있다면, 그 대척점에는 <때로는 그대가>, <빠삐용>에서

 신세대론에 지친 신세대, 결국 어른이 되어 버린 여자의 '짠함'이 존재한다.

 나는 이 대비와 양면성이 무척이나 흥미롭고, 또 <불가능한 작전> 1, 2번 트랙에서 명백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사족으로, <나쁜 영화>의 가사를 쓴 백현진은 어어부 프로젝트로 97년 개봉한 장선우의 <나쁜 영화>에

 음악을 취입한 바 있다. 노래 <나쁜 영화>는 96년에 발표되었고, 거기서 백현진은 "가장 싫었던 영화는? 나쁜 영화.
 영화 감독은 영화를 낳고... 극장용 영화는 아니지만 감독은 영화를 낳았다"고 쓰고 있다.

 또 노래가 시작되기 전에 취조풍으로 주고받는 대화에서 이윤정은 "좋아하는 음식은?"이란 질문에

 "껌"이라고 대답한다. 친구가 들으면 진짜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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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나는 어제 들은 한 노래를 온종일 흥얼거렸다 :

 그것은 어젯밤 포스팅으로 올린 바 있는 트렘블링 블루 스타의 <Little Gunshot>이란 노래다.

 캐치한 멜로디에 홀려 무의지적으로 되뇌이는 것과 이 '사로잡힘'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지 않을까?

 (가령 EXID의 "위 아래"의 후렴구가 좀처럼 뇌리를 사라지지 않는 것과 "How can you argue with..."로

 시작하는 "리틀 건샷"의 후렴구를 의도적으로 연거푸 부르는 것은 결국 동일한 걸까?

 선정적인 걸그룹에 '눈을 빼앗긴' 이 저속함을 내가 인정하지 못하여 이를 질적으로 양분하는 걸까?

 : 고층적인 미학 의식을 지닌 내가 "이따위" 음악에 홀리다니, 이것은 이 음악, 아니 포르노의 마력 탓이다. 난 죄가 없다구!)

 

 하여 비가 축축히 내리는 일요일 잠깐, 직접 내린 커피와 함께 "한 노래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생각해보았다.

 먼저 한 노래와 사랑에 빠지기 위해선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노래 자체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관계성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노래에 내재된 이미지와 뮤지션의 생애가

 한 맥락으로 얽혀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노래의 이미지와 뮤지션의 이미지가 언제나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택적으로 뮤지션에 의해 차용된 이미지 전략으로 인해 진정성과 파생현실 사이의 괴리는 너무도 심화되어

 우리는 그 둘을 분간할 수 없다.) 

 

 노래의 이미지란 다양한 요소에 의해 자의적으로 상상된다. 멜로디, 음들의 구성, 형식 등.

 그러나 가장 중요한 가사가 우리는 외국어란 제한된 영역으로 은폐되어 있다. 능란한 구사자가 아니면

 외국어 가사를 번역 과정 없이 스무스하게 수용하는 청자는 그리 없을 것이다. 때문에 외국곡을 감상함에 있어

 우리는 굉장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맥락으로 외국곡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시작된 상상이 심화되면 현재 내가 위치한 사회, 위치, 태도로부터 벗어나(이를 탈영토화라 해도 될런지)

 내면의 새로운-상상된 영역(이를 재영토화라고 해도 될런지)으로 발전된다.

 노래의 이미지는 결국 현실에 동기화된 나의 감각을 일순 유리시켜 새로운 영역으로 '탈주'하게끔 돕는 길잡이가 된다.

 

 또 다른 요소로는 존경이 있는데, 이는 어쩌면 내 개인적인 기질일 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지금-여기를 온전히 사유할 수 없는 인간인데, 그 이유인즉 직관이 너무 뜨거워 지금 당장 나를 둘러싸고

 횡행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자시고 할 이성이 지금-여기에 실종되고 만다.

 내가 지금-여기를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 뜨거운 직관이 어느 정도 진정된 이후에서다.

 이를 어느 정도 무마하고 진정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은 존경이다. 상대방과 상황에 대한 존경만이

 나를 뜨거운 직관으로부터 건져올려 내 감각을 평화롭게 열어놓을 수 있다.

 

 연애와 마찬가지로, 한 노래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삶을 뒤흔드는 경험일 수 있다.

 우리 삶의 깊이를 부여하고, 총천연색 칠을 하며 의미를 수놓지만 

 굉장한 고통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과정을 제어할 수 없고, 난도질 당한 마음을 안쓰러이 바라보며 자신의 총체적인 한심함을 마주하는 건 

 언제나 '뜨거운 직관'이 물러난, 지나간 계절을 기억하는, 한참 뒤에나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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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또복 :

 

Trembling Blue Stars, Little Gunshots (Live)

 

How can you argue with what happens
When our eyes meet
The spot we hit
The way we leave each other hungry?

 

How can you argue with … you an me?
You're waving from a leaving train
And every part of me screams your name
Think again, please, think again

 

거장의 음악이 가능하다면 이런 식이 아닐까.

비공식 홈페이지에 아직 가사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www.tbstars.co.uk

 

 

Posted by 또복 :

 

The Challengers, Surfbeat

 

Posted by 또복 :